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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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독일의 루돌프 크라우지우스가 처음 만듬)의 법칙은 내가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처음 접했고 지금도 나를 가장 흥분시키는 개념이다. 이 법칙은 단순히 과학영역에 국한된 법칙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존재를 통째로 지배하는 법칙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전,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모든 메시아 혹은 깨달은 사람들은 이미 엔트로피의 법칙을 알아냈을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이 수학적 방정식으로 표현하는 대신 한 편의 시로 때로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표현했다라는 것만 다를 뿐.

 

저자는 엔트로피의 법칙과 인류의 발전과정을 연계시켜 허와 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무질서가 극대점에 도달하면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장구한 시간개념이 필요하겠지만...

 

호킹박사는 "시간의 역사"에서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수축의 단계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엔트로피는 증가할 것이라고 말함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완전히 봉쇄시켜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이 깨어지는 시공을 추월한 영역대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무효파동이 유효파동으로 전환 되는 영역대가...

단지 '어떻게와 왜'라는 의문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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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오쇼 라즈니쉬 지음, 이윤기 옮김 / 섬앤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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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위대한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가 말하는 반야심경.

반야심경이라는 책 제목으로 '불교네, 기독교네' 하는 따위의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실 불교에 대한 종교적 견해는

별로 언급하지도 않는다.

 

오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존이지 언어와 관념의 허망함이

아니다. 21c에 영적 지도자로서 '깨달은 자'라고 칭송 받지만

나는 오히려 오쇼를 21c 최고의 현실주의자 혹은 실용주의자

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우리가 잊고 있던 실존을 꺼집어 내어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쇼 또한  깨어있음을 강조하고 그 깨어있음의 능력은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있지만 지식이란 눈속임에 가려 그 능력을 잃어 가거나 발휘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이미 내재된 직관의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

그럴려면 침묵 즉 명상을 해야한다.

불타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그것을 침묵으로 깨달았고

침묵으로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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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욕망하는 식물- 세상을 보는 식물의 시선
마이클 폴란 지음, 이경식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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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욕망하는 식물인지도 모르겠고 왜 책을 출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욕망하는 인간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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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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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포장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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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를 보라 - 삶에 찌든 친구를 위한 3년간의 편지 에세이
김윤창 지음 / 인간의기쁨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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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 이거 뭐라고 해야되나!?

 

철학할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을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극단적 양면 즉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몸소 실천하는 철학자???

 

대체로 저자와 큰 이견은 없다.

그의 표현방식이구체적이지만 결정적 대목에서는 메타포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공감 때문이기도 하다.

 

10번째 편지에서 그가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약간의 이질감을 느낀다.

 

<니르바나의 출발점은 결국 동정심이므로, 니르바나에 이른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괴로움에 공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니르바나에 편안하게 파묻혀 지낸다면, 이는 곧 다르마의 본질적인 역학을 훼손하는 일이 된다.>

 

열반의 출발점이 동정심???

붓다의 존재가 누구를 혹은 자기자신을 동정하는 마음에서 출발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일뿐만 아니라 붓다를 비하하는 말이다. 다른 이의 괴로움에 공감을 하는 것과 니르바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니르바나에 개인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는 없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이타적 사랑이지 그것이 곧 니르바나는 아니다.

  

또한 "니르바나에 이른 자 = 편안한 자"라는 공식은 니르바나의 매우 협소한 해석이다. 열반에 든 자에게 편안함과 불편함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다르마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뭐 그냥 이웃을 사랑하며 선하게 살자라는 해석으로 좋게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는 철학자이기에 또한 이런 이원론적 열반 해석이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잉태할 위험성이 있기에 따져 본다.

 

하지만 내가 저자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 왜?

완전한 합일이라는 이상적 조건만 배제한다면 같은 부류이고 결국 같은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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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창 2012-01-01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값진 지적,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직판매 2012-01-04 01:44   좋아요 0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친히 답글을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