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후 영화를 못 본 것이 아쉬웠다. 남한산성을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낸 것도 봤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읽는 내내 먹먹했다. 의중은 있으되 무기력한 인조도 의와 예가 목숨보다 중한 김상헌도 살아야 무엇이든 도모한다는 최명길도 이리저리 휘어지며 상황을 기다리는 김류도 모두 원하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 자리에서 나라가 주저앉지 않게 하는 것. 조선에서 나라는 곧 임금이었고, 그 임금이 죽으면 나라는 끝이다.라는 마음은 모두 같았으리라.
-
-
그 때는 맞고 지금은 달라졌다. 남한산성의 보이는 싸움과 보이지 않는 싸움들 끝에 삼전도의 굴욕이 남았고 그 뒤로도 조선에겐 200년의 역사가 더 남겨졌다. 시대적 상황, 그 시대의 윤리와 가치와 도덕. 무엇이 중요한가는 계속 달라져왔으나 지금 어느 무도하고 광포한 세력이 이 나라의 대통령을 인질로 잡는다면 그 다음의 선택이 남는다면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없어도 국가가 사라지지 않고 국민이 존재하면 국가의 지속이 가능한 이 시대에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다. 그 시대에 대입하자면 많은 백성이 희생 당했으나 지켜야 할 백성이 더 많았고, 많은 백성이 주권을 잃었으나 모두 잃지 않았고, 많은 영토를 짓밟혔으나 아직 빼앗기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 온전히 남은 것들을 생각할 순 없었다.
-
-
루이 14세의 말처럼 ‘짐이 곧 국가’고 임금은 ‘하늘이 내린 나라의 주인’인 시대라 청의 요구는 납득하고 수용할 수 없는 치욕이리라. 조선을 이어받은 한국은 작은 반도국가일 뿐이다. 덩치 크고 힘 센 나라들 틈새에 끼인데다 동양과 서양의 대척점이고 정치 이념의 대척점이라 이 작은 내 나라는 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당당하지 못했다. 그것에 매번 화가 나더라. 상황은 어쩔 수 없다지만 잘 이용할 수도 있을텐데, 어쩌면 이롭게 현명하게 대처할 수도 있을텐데 하며 분개했다. 특히 최근 몇 년은 더했던 우리의 대표가 타국의 대표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봐주기 힘들었다. 나라가 작건 크건 힘이 세건 약하건 나라의 대표이니 만큼 대등하게 손을 잡고 대등하게 마주하길 바랐을 뿐이다. 입지가 좋지 않다고 쉽게 체념하고 굽실거리는 사람을 대표로 두고 싶진 않았다. 그 점에서 나는 김상헌과 닮았다. 치욕과 굴욕을 국민에게 전가하지 말로 당당하고 바르길 원한다.
-
-
그렇다면 최명길이 그른가. 치욕보다 목숨이 중하다하는 것은 틀렸는가. 아니다. 제 목숨을 담보로 타인의 치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되나 내 목숨과 더 많은 목숨을 위해 치욕을 감당하는 것은 숭고한 희생이다. 그로 인해 나라를 지키고 목숨을 지킨다면 그것을 감당하는 것 역시 국가의 대표인 임금이 할 일이다. 국민을 담보로 국토를 담보로 제 치욕을 지킨다면 그것은 왕의 자격을 잃는 일이 아닐까.
무엇이 중한가. 순간의 수치와 굴욕으로 많은 것을 지켜낸다면 그것이 어찌 단순한 치욕과 굴욕이겠는가. 삼전도의 치욕은 인조의 치욕이 아니다. 그것이 슬프고 원통한 이유는 작고 약한 나라가 살아남는 방편이었단 사실이지. 이제 우리에게 그런 굴욕의 역사가 반복되길 원하지 않는 갈망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
-
지켜야했다. 어떻게든 지켜야했다. 생각할 것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이다. 누구를 탓할 수 있는가. 나라를 지키고자 했고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이들을 탓할 수는 없다. 탁상공론이나 하고 드잡이질이나 하는 높은 자리에서 나라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양반님네들과 나라보다 목숨과 생존이 중한 뭇 백성들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는 단지 과거에 그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의미있는 이유는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뼈아프게 알고 배워야 한다. 그것은 권리이자 의무이고 뒷세대를 위한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