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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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예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요. 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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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볼군이 불쑥 '살아야 되는 이유나 존재하는 목적이 따로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꿈이 있든 없든 간에 살아가는 데는 다른 목적이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어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또래보다 작은 아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래, 다른 게 필요없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가치있는 거야라며 대화를 이어갔다. 맞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대단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되고 뭔가 이뤄내지 않아도 되고 부족하거나 못나도 되고 아프고 약해도 된다. 존재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넘치게 가치가 있다. 다른 기준도 없고 다른 의미나 목적도 없다. 그것은 모두 각자의 몫이다. 선택하고 결정하고 꿈꾸고 노력하고 견뎌내고는 모두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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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읽었더니, 책장을 덮자마자 복받쳐 온다.
나는 한번도 강자였던 적이 없다. 나는 내내 약자였고 그래서 너무 일찍 삶이 길고 참담하고 지난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렇다고 내 삶이 끔찍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컸고 그것을 위해 너무 일찍 나와 주변을 다그쳐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해주지 않는 것, 이해해주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내가 그럴 수도 있는 것처럼 그들도 그럴 수 있다.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해보자. 그래야 내가 괜찮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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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즘이니 성소수자니 이런 것도 모르겠고 그저 선입견으로 약자를 만들고 그들을 찍어누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재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누가 누구보다 더 가치있고 누가 누구보다 더 의미있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모든 평가 역시 취향이나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냥 좋고 싫고의 문제. 그것 뿐인데 편협하고 옹졸하다는 말을 듣기 싫으니 어딘가의 기준을 빌어와 들이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너도 그럴 수 있고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기준만이 유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존중받을 수 있기를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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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젠도 엄마도 딸도 그 애도 모두 알겠더라. 다 참 착하고 상대를 사랑해서 라는 것도 알겠더라. 다들 참 닮았더라는 것도 알겠더라. 그래서 더 안쓰럽고 슬프고 속상했다. 그렇게든 살아내면서 그래도 최소한 그러면 안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하는 것들에 치열하게 맞서며 산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덕에 그래도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는 것이다. 맨 밑바닥에 아주 작고 아주 연약하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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