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서로 사기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실로 훌륭한, 그야말로 맑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사례가 인간의 삶에 가득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석인다는 것에 딱히 특별한 흥미는 없습니다. 나 역시 광대 짓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나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감이니 뭐니 도덕성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도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같은 인간이 내게는 난해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끝내 내게 그런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알았다면 나는 인간을 이토록 두려워하며 죽을 둥 살 둥 광대 짓 서비스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요. 인간의 삶과 대립하며 밤마다 지옥같은 이런 고통도 맛보지 않았겠지요. 26,27p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건 얼마나 만만하고 어리석은 짓인가.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주관에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한 것에 구역질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고 표현의 기쁨에 젖는다. 즉, 타인의 생각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화법의 원초적인 비전을 다케이치에게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40p

아무 타산도 없는 호의, 강매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사람에게 보여주는 호의. 47p

나는 그때 목을 움츠리며 웃던 납치의 얼굴에 드러난 그 교활한 기척을 잊을 수 없습니다. 경멸의 기척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 세상을 바다로 비유한다면 그 바닷속 천길만길 깊은 곳에 그런 기묘한 기척이 떠돌 것 같은, 뭔가 어른들의 삶의 깊은 밑바닥을 흘끗 드러낸 듯한 웃음이었습니다. 80p

그건 내가 속이고 있기 때문이야. 이 아파트의 사람들이 모두 내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얼마나 그들을 두려워하는지 모르지? 두려워하면 할수록 그들은 내게 호감을 갖고, 나는 그런 호감을 받을수록 더욱더 겁이 나서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는 이 불행한 병적인 성격. 91p

아아, 인간이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고, 아예 완전히 잘못 보았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평생 그걸 깨닫지도 못한 채 상대가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고 있는 건 아닐까요? 92p

지금 나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이른바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라고 생각되는 건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 134,1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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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39세고 다자이 오사무는 39세에 이 글을 쓰고 죽었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읽다보면 그래, '당신은 아직 철이 들지 않았군. 괴롭다고 해봐야 그저 도망일 뿐인 건 알고는 있나? 비겁한 변명인 것은 알지? 아, 물론 당신도 알고 있으니 저런 글을 써댄 것일 게야. 분명 그렇겠지.' 싶은 마음이 든다.
인간이란 그렇지. 사는 것이란 그렇고. 그렇다면- 우리는 힘차게 살아가야하나? 아니면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면 되나? 나는 어느 쪽도 좋다고 생각한다. 각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괴로울 것도 없다. 누구는 그것을 감당하고 누구든 저것을 참고 누구는 또 즐기면서 그렇게들 산다. 다르다고 괴로울 것도 없고 다르다고 비난할 것도 없다.
고등학교 때던가-
'엄마는 재미도 없다면서 왜 살아?'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내겐 그 장면과 대화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마지못해 살아가는 것, 끝없이 한탄하는 것.에 대해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장은 재미있지 않더라도 일단 내가 뭘 재미있게 생각하는지를 먼저 찾아야 되지 않나- 알고 있다면 최대한 노력해서 그 즐거움을 가까이하면 되지 않겠나- 한 이십년쯤 더 살고보니 그것 역시 만만치않다. 그래도 엉망진창, 아비규환이라도 제멋대로 살았더니 내가 뭘 좋아하는 구나 정도는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운이 좋았구나 싶어진다. 그래서 오늘도 싫은 것들 가득한 사이에 재미있는 것 한 두개를 끼워서 지낸다. 더 재밌을 것들도 머릿속에 하나씩 쟁여둔다. 그것이면 족하다.

다자이 오사무가 더 오래 살았다면 좀 다른 글을 썼을까?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계속 그것만 보이고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모종의 중독이랄까? 관념이나 생각도 그와 같아서 점점 더 좀스러운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아니면 도통한 어르신이 된다거나- 여튼 상상조차도 극과극에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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