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로 채워진 삶을 낱낱이 전하고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이 사랑고백이라니. 부조리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랑이냐고, 부조리따위 뛰어넘는 사랑이냐고 슬쩍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도 역시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떤 방식이냐 형태냐를 떠나 십원반푼어치의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일말의 사랑이 구원의 시작이다. 그 외엔 없다. 그 사랑을 오해해선 안된다. 뭔가 대단히 거창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말아달라. 이런 생각과 함께 전혀 관계 없는 기도문이 떠올랐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기도문. 굳이 종교가 아니라도 심판이 두렵지 않은 것이 당당함인지 뻔뻔함인지 알 게 무언가. _ 양비론.은 쉽다. 양쪽 다 틀렸다고 이쪽도 저쪽도 문제가 있다고 각자의 사정이 있고 서로 다투지 말고 좋은 쪽으로 해결해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쉽다.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 어차피 사는 게 그렇다는 말로 끝난다. 이것이 어떻게 중용이고 합리인가. 그저 위선이 아닌가. 지금 이대로라면 어떻게 될 지가 그려지는 데 그래도 괜찮아서 하는 말인지 그저 조금의 수고도 하고 싶지 않은 변명인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은 과연 누구에게 좋다는 의미일까. 모두에게 좋은 것, 옳은 것, 다 만족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셋 중 하나다. 이미 기득권이거나 코 앞만 보이거나 만사 귀찮거나. 아니 셋 모두 일 수도 있고 셋 중 둘 일 수도 있겠지만 셋 무엇도 아니지는 않을 것이다. _ 직전에 읽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과 짝 같은 책이다. 함께 읽으면 더 좋겠다. 그리고 과연 괜찮은지, 더 알아야 하지 않을 지, 내 선택은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봐도 좋겠다. 르포와 소설, 어느 것이 더 잔인하고 처참한 지도 생각할 좋은 기회다. #산자들 #장강명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