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 알아야 하느냐고 알지도 못하는 아이고 죽음은 불편하고 아픈 일인데 왜 꼭 알아야 하느냐고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알 권리와 마찬가지로 알아야할 의무도 있다고 말하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알아야할 의무에 대해 말할 것이다. 알고 난 다음까지 강제할 순 없겠지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단 알아야 생각도 하고 의견도 생기고 행동도 뒤따른다. 변화는 그렇게 온다. 물론 지금 이 사회, 나라, 제도 모두에 만족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들은 예외로 하자(단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가능성을 외면할 순 없으니-).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알아야한다. 변화가 거저 주어질 거라고 믿거나 내 몫은 아니라거나 한다면 그저 변명이라고 비겁하다고 도둑심보 아니냐며 싸우게 될 지도 모르겠다. _ 좀 더 자세하고 정확히 알기 위해 ‘현장실습생’이라고 구분지었지만 결국은 모두가 관계된 이야기다. 내 일이 나이고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마음은 내가 로또를 안사서 그렇지 사기만 하면 무조건 1등이라고 믿는 것보다 더한 착각이다. 내게 일이 닥치고 난 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져야지만 내 비겁함과 무괌심과 안일함을 깨닫는 것은 너무 늦다. 너무 늦기 전에 내게 직접 일이 닥치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내 안전과 안녕의 확률이 높아지는 것을 왜 모를까. 모두에게 투사가 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앞서서 싸울 자신은 없다. 그저 아는 데서 시작하자고 알고 불편하고 신경쓰이고 그래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아주 조금씩이라도 뭐든 해보자고 그래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게 된다. 내가 공포와 불안과 안전에 민감한 지도 모르겠다. 분명 그럴 것이다. 지금 당장 대안이 없고 막막한 일들에 대해 모두 민감해진다면 그 중 누군가는 대안을 내놓을 수 있고 그 중 누군가는 행동력이 있을 것이며 그 중 누군가는 계산하고 확인할 것이다. 왜 그걸 바랄 수 없는가. _ 기회가 될 때마다 말한다. 나 역시 불편하다. 아니 민감한 나는 그냥 불편한 것이 아니라 아프고 힘들고 지친다. 생각만으로 너무 고되고 불안해진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아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힘든데 실재로 닥친다면 견딜 수 있을까, 그 전에 뭐라도 어떻게든 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덜 미안하고 덜 아프지 않을까. 그 책임에서 혼자 몰래 빠져나와선 안되는 것이 아닐까.#알지못하는아이의죽음 #은유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