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 앨리스 먼로의 ‘작업실’까지. 아, 최근 나온 김정운(교수? 작가? 화가?)의 글에서 언급된 ‘슈필라움’도 포함해야 될까? 여성과 남성, 혹은 아이와 성인 모두에게 단독의 보호받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 공간은 어쩌면 내면의 확장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단 얼마라도 완전한 단독이 가능한 시간과 공간. 근본적으론 그런 이야기일 수 있겠다. _ 버지니아 울프와 앨리스 먼로가 혼자 조용히 작업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방.을 말했다면 도리스 레싱은 동굴같은 온전히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와 앨리스 먼로의 방은 직업인으로서의 공간이고 도리스 레싱은 자아의 독립성을 위한 공간이기에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어쩌면 도리스 레싱의 ‘19호실’은 숨구멍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발전과 영역이 아닌 존재하기 위한 숨구멍. 안전하고 비밀스럽게 보호되어야 하는 숨구멍. 19호실에서 수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머물 뿐이다. 정해진 시간동안 그저 머물 뿐이다. 어느 때, 어느 곳보다 절박하게 여겨졌다._ 도리스 레싱의 ‘다섯번째 아이’는 내가 읽은 소설 중 가장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다.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어느 부분에도 반박할 수 없어서 너무 무서웠다. 그것을 이야기로 여길 수 없었다. 선명하고 뚜렷한 어떤 상황과 그것에 대한 정확한 표현에 긴장하고 만다. 이야기가 아주 특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그것이기 때문에 갖는 사실성에 긴장하고 만다. 여전히 레싱은 두렵다. 그래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그녀가 1919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2019년을 살고 있는 나를 좌절하게 한다. 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대체 언제냐고 악을 쓰고 만다. 대체 언제! #19호실로가다 #도리스레싱 #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