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몇 번씩 감탄했다. 이게 나보다 더 오래된 문장이라니, 이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품었던 생각과 시선이라니. 날카롭고 명확한 문장이 이렇게 근사하다니. 우리는 아직도 고작 이만큼이라니. 생각이 많아도 읽는 것이 더딜 이유는 없었다. 그 많은 생각이 이야기 속에 잘 녹아서 이야기 따로 생각 따로일 필요가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러는 오해할 수도 있겠다. 앨리스 먼로의글이 온통 오랜지 색이라고 해도 직접 ‘이건 오랜지 색이다’라고 외치고 있지 않아서, 오랜지 색을 드러내는 방법이 빨강과 노랑과 그 속의 음영까지의 표현이라 어떤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오랜지 색일 줄 알았는데 오랜지 색이 아니잖아!!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너무도 잘 표현된 오랜지 색이라고 생각한다. 정교하고 섬세하게 표현되어서 40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거나 낡지 않은 그런 색. _ 어떤 주제로 무엇을 주장했는지 잘 감추고 잘 드러내고 그 사이사이 독자가 개입할 수 있어야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작가의 문장에 끄덕끄덕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문장에선 질문을 던졌다가 어떤 문장에선 답을 얻고 어떤 문장에선 분개하고 어떤 문장에선 위로 받고. 미묘한 화학작용 같은, 모호하고 반투명한 사이. _ 자주 자신에게 속는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착각한다. 덕분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분명 저것을 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너무 메달리고 휩쓸렸는데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은 한참이 지난 후다. 지긋지긋하게 반복하고 더는 안해! 못해!라고 소리친 후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확인한다. 자신이 원하고 바랐던 것. 그리고 그 사이사이 개입된 많은 오해와 시기와 생계와 도덕과 시선. _ 괜찮다. 물론 지나고나야 괜찮다. 그 때 그 순간들은 괜찮지 않다. 전혀 괜찮지 않다. 하지만 지나면 괜찮다. 괜찮은 이유는 시간이 지나서 과거의 일이 되버렸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 과거들이 지금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때론 그 점이 몹시 화가나는 부분이지만 그 과거들이 현재를 만든다. 덕분에 어느 순간(좀 늦은 감도 있지만-) 알게 된다. 그 시기를 아주 조금만 앞당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거지소녀 #앨리스먼로 #문학동네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