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세대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결정해야하는 세대였을 것이다. 혼란스럽고 갈등하며 반목하다가 동질감으로 술잔을 비우고 마치 생각많은 사춘기처럼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세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튀어오르고 번쩍거리고 제 각각의 색깔과 모양으로 도드라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막말로 중2병 새대인 셈이다. _헤밍웨이로 말하자면 마초라 할 수 있다. 그 마초적 이미지를 한번도 근사하게 여겨본 적이 없다. 자존감 낮은 불쌍한 인간들로 여긴 적은 많다. 과시하기 위해 짓밟고 올라서야 하고 찍어눌러야 하고 나만이 옳은 그들의 세계는 몹시 비틀린 것이라 모든 비틀린 것이 그렇듯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뿐이다. 글에서 자주 만나는 거친 남성성의 아랫부분엔 약한 것을 들키기 싫은 알량한 자존심이 깔려있다. ‘남자가 말이야’ 속에 남성의 자유와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언어 속엔 속박과 구속이 있을 뿐이다. 규정되어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은 강박이 되고 만다. 헤밍웨이 소설 속의 그런 남성들이 근사하게 다가오지 않는데, 과연 헤밍웨이는 진짜 마초였을까?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비웃고 있었던 건 아닐까? 결국 마초 주변엔 창녀나 여신만 남는다.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 불쌍한 노릇이다. _ 헤밍웨이가 평생 죽음을 쫓아 다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 평생을 함께하다 결국 죽음으로 인도한 우울증 역시 작가의 해석과 내 인상은 다르다. ‘오래도록 소년으로 머물러 있는 남자들이 있지, 평생을 그렇게 사는 남자들도 있고. 쉰이 되어도 그런 자들은 소년에 지나지 않지. 위대한 미국 남자들, 그 빌어먹을 이상한 남자들이 바로 그런 소년 어른들이지. (프랜시스 매컴버의 짧았던 행복. 중-)’이 문장이 헤밍웨이에 대한 내 인상이다. 헤밍웨이는 육체의 성장과 정신의 성장이 불균형했다. 내면의 욕구와 표면의 욕구를 구분하지 못했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무엇을 추구하고 성취하였으나 성취 후의 실망과 불만족이 잘못된 것을 추구한 증거라면 그는 죽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는 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반복된다. 존재의 증명을 위해 위험에 뛰어들고 행복을 위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즉각적인 무엇에 끌려다니며 ‘하고 싶어! 할래!’식의 어린아이처럼 군다. 상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군림하려 든다. 헤밍웨이는 자신을 모른 채 자신을 비아냥거린 게 아닐까? _ 헤밍웨이의 삶과 문학. 둘을 따로 땔 수 없는 이유는 표면과 내면, 앞면과 뒷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핏 삶을 문학에 고스란히 녹인 것 같지만 그린 감정과 느낀 감정 사이의 간극이 너무 절대적이라 우울해진 것이리라. 작가의 머릿속에서(혹은 문학속에서) 벌어지는 과정과 결론응 만족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빙산의 윗부분만 드러난다해도 감춰진 거대함이 있다는 것을 문학에만 적용하고 삶에 적용하지 못한 탓이다. 덜 자란 채로 높아졌으니 더욱 제멋대로 굴 수 있었을 것이다. _ 이 이상하고 괴팍하고 망나니인 헤밍웨이를 좀 더 알아야겠다. 지금의 시선으로 헤밍웨이를 바라보며 때론 변명해주는 백민석 작가의 시선 덕분에 조금은 알 것도 같은 기분이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온 생을 알아야 하는 일이겠지만- 그렇게까지 친해질 생각은 아니니 종종 만나며 조금씩 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