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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줄리언 반스의 말과 글과 생각은 늘 납득이 가능했다. 그것이 내 것과 꼭 같지 않아도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흥미로웠다. 삶이든 죽음이든 사랑이든 세상이든 간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그런 것도 가능하지라고 여겨졌다. 생각을 거듭하다가 마주하는 주관적인 결론이 그저 글이 아닌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랍기도 했다. 그래서 늘 기대하고 늘 만족한다. 요 몇 년 사이 가장 마음을 움직인 작가라면 단연 줄리언 반스였다. 뒤늦게나마 그를 만난 것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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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 너무 많은 말과 글과 생각과 이야기가 있다. 그것 모두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서 인정하고 말 것도 없다. 그저 그런 사랑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무엇이 사랑이고 아닌가에 대해 과연 어떤 것이 사랑인가에 대해 진정한 혹은 지나치게 가벼운 사랑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고 만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이 있는 걸까라고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를 생각하다보면 끝없는 굴레에 갇힌 기분이 되고 만다. 이런 사랑도 저런 사랑도 있다. 때론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망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한다. 그 무수한 사랑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허세를 떨 수야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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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형태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쿠키틀이 떠오른다. 엇비슷한 쿠키틀로 찍어내도 조금씩 다르다. 한 점의 오차없이 꼭같은 모양으로 찍어지진 않는다. 대충 보면 다 거기서 거기지만 일단 찍는 과정에서부터 조금씩 달라진다. 분명 같은 쿠키틀로 찍었는데도 말이다. 거기에 구우면서 또 달라지고 판에서 떼내면서 또 달라지고 장식하는 데서 또 달라진다. 무한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하트모양 쿠키인 것이다. 그 하트모양쿠키에 돌이 들어가거나 머리카락이 들어가거나 실수로 녹지 않은 설탕이나 소금이 잔뜩 들어갔을 수도 있다. 모두 가능성의 범주에 있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쿠키가 있을까. 쿠키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다고 쿠키를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아직 쿠키를 맛볼 수 없는 이가 나지 않은 영유아는 내멋대로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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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연애의 기억과는 그 비율이 다르다. 우리는 보통 연애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긴장과 설렘이나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잔인하거나 슬픈 연애의 과정과 연애가 끝난 직 후의 절절한 아픔에 대해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과 그 과정과 이별 직 후에는 비친듯이 사랑에 대해 탐구하지만 그것이 모두 끝나고 기억이 순차적이지 않고 상대의 몸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이미 사랑이 아니고 연애도 아니어서 그저 과거의 작은 부분이 되고 만다.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 그건 사랑은 아니었다고 그런 연애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그 부분을 도려내고 싶다고 혹은 미련, 그리움 등으로 남는다. 어떻게든 그 기억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머문다. 현재의 내겐 작용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이야기나 언뜻 떠오른 생각 정도일 뿐.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록 나를 지배하고 뒤흔들고 가로막진 않는다. 아니 사실은 그런 연애도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런 연애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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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과정을 사랑하므로 다음 책도 줄리언 반스. 아껴둔(?) 책이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