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기 전엔 국가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농처럼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해준 게 뭐냐!’고 지껄일 뿐. 그리고 2014년 4월 16일을 기점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한다면 존재 의의가 있는가에 대해 끝없이 생각해야 했다. 참담했다. 아이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준 것이 미안했다. 그러다가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권으로 이어진 지금 나는 다시금 괜찮은 나라를 꿈꾸고 있다. 절망은 공포를 낳고 희망은 열정을 낳는다. _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디스토피아 관련 문화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다. 이렇게 넘쳐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이 경각심을 주고 우리를 깨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역할을 위해선 바른 대안과 불안해소가 함께 있어야지 않을까? 희망이 없고 꿈꾸지 않고 쉽게 체념하는 것이 단지 개인의 책임일까? 좀 더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를 기대하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괜찮다는 말로 제자리에 주저앉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현 여부를 떠나 우리가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_ 이 이야기는 맘에 안드는 부분이 많았다. 인물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억지로 짜맞춘 느낌도 강하다. 처음엔 거친 표현도 불편하고 몰입도 어려웠다. 읽어갈수록 이제껏 너무 경직되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했다. 국가의 존재 의의 이전에 인간의 존재 의의를 먼저 생각한다면 주어진 의무 이전에 권리를 생각한다면 좀 더 너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현실에도 희망을 보고 꿈꾸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즐거워야 한다. 신나게 발을 내딛어야 한다. 닫힌 내 시야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이 이야기가 고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절망과 좌절이 아닌 희망과 꿈임을 깨닫게 해준 이 이야기가 고맙다. 심란한 현실 속에서도 유쾌한 꿈을 꾼 등장인물들을 응원한다. 물론 그들의 능력이 나라 하나 쯤은 뚝딱 세울 수 있는 정도라 나 따위의 응원은 필요치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