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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모던 -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한석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한석정(1953~) 지음, 158×230×30mm 518쪽 803g, 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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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부지런히 대충대충 어영부영 민족과 조국‘ 아마도 남북한 공통으로 친숙한 구호가 아닐까. 잠시 스쳐 지나간 만주제국을 되돌아보니 저 모든 것의 원류라 한다.
남북한은 만주제국의 복제국가라니? 만주제국에 관한 시대 사료와 연구가 대부분 일본 위주인 한계가 있다. 자칫 아버지 일본이 요절한 아들 만주를 그리워 흘리는 눈물인 양, 식민주의 미화로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60년대 불도저 체제의 연원이 어디인지 고찰한다‘고 분명히 못을 박는다. 지나치게 확대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다.
만주제국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할 말이 많아질 것이다. 일본제국의 괴뢰국이냐? 새시대의 다민족 연합 신흥국이냐? 부산에서 하행선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처 만주로 가는 철길은 수탈에 지친 농민의 마지막 탈출구 엑소더스(구약성서 탈출기)이며, 지식인이라 자처하던 식민지 출신자의 도피처나 병역 기피 수단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에겐 독립운동의 기억만 남아 있었다.
한국 역사에서 근대라는 의미, 근대라는 용어가 타당할지도 의문이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 운영은 일본 식민주의와는 다르다. 한반도는 일본에게 식민지보다는 이주 목적이었겠다. 오늘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이다.
‘건국, 재건, 선전, 대중예술, 개척•••‘ 내로라하는 알만한 이의 친일 행적과 만주제국 이력이 이런 관계였다니! 더욱이 우리가 겪어온 육칠십년대의 모델이 만주제국이었다니 그동안 들었던 의문이 다소 풀린다. 다만,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류요 원조‘라는 논조의 지나친 확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꼭 만주이기 때문일까? 이제 슬슬 동아시아 융합 역사해석이 필요한 시점일까? 아직 멀었다. 적어도 남북한이 고루 대등해지고 중국이 스스로 친 보호막이 걷힌 이후에야 가능하리라. 사랑하는 벗의 권유로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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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 관동군의 선공으로 만주사변이 발발한다. 불과 1만 4천 명의 관동군이 장쉐량 휘하의 25만 동북군을 기습해 손쉽게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까지 만주 전체를 석권했다. [•••] 관동군은 일본 제국에서 항명과 독단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로부터 꼭 30년 후인 1961년,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동북아 초유의 군사 쿠데타가 한국에서 발생했다. 박정희 육군 소장이 이끄는, 전군의 1퍼센트도 안 되는 불과 3천여 명의 병력이 단시간에 한강을 넘어 수도를 장악했다. [•••] 휴전선에 주둔한 최대 병력인 제1군 사령관 이한림(공교롭게도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이었다)을 사전에 체포한 것도 쿠데타 성공에 한몫했다. 봉건 시대의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 특유한 하극상과 기습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킨 것이다. [•••] 약 20년 뒤 전두환 소장의 쿠데타도 이런 패턴을 밟았다. 이번에도 1개 사단밖에 안 되는 소수 병력을 신속히 태평로로 진주시키고 보안대 요원들이 삼군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방위사령관을 기습적으로 체포함으로써 성공했다. 박정희는 만주국군 시절 상관이었던 간노 히로시菅野弘(2.26 사건에 가담했다가 관동군으로 좌천된 인물)에게 감화받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정치화된 장교들, 즉 한국전쟁 후 장성 진급의 동결이 촉발한 ‘하극상 사건‘의 가담자들과 의기투합했다. 이들의 목숨을 건 거사의 본보기는 바로 항명의 무대, 만주였다. 그런데 관동군의 영향은 쿠데타에 그치지 않았다. 관동군이 주도한 급속한 산업화, 건설, 사회동원 역시 재건 체제의 모델이 됐다.˝
-159~160쪽- <3장 건국과 재건> 중에서
˝이 연구는 1960년대 한국에서 식민주의와 근대가 맺는 복잡한 관계를 논한 것이다. 전쟁은 파괴요, 새 출발이다. [•••] 1930년대 총동원의 현장 만주국의 통제경제는 1960년대 한국의 체제 경쟁과 세계체제 내의 상향 이동에 공헌했다.[•••] 한국의 오늘과 직결되는 만주는 장기간 억제되어왔다. 조선 농민들의 엑소더스, 경계의 확장, 광활한 대륙을 달리는 만철, 폭력과 근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오족협화, 고난과 개척, 이류들의 약진, 국방국가의 비전, 국제적 계보의 영화·음악 등이 만주를 설명하는 장면들이다. 1930~40년대 만주는 이러한 것들의 일종의 콜라주로, 그리고 1960년대 한국은 그 시대와의 중첩적 국면으로 파악될 수 있다. [•••] 냉전의 시작으로 해방 당시 조선인 인구가 약 200만 명 정도로 치솟았던 만주의 기억은 편리하게 망각됐다. 이 공백 속에 오로지 항일 서사만이 살아남았다. 이 시선 앞에 만주 출신들ㅡ장교에서 관료, 협화회원, 관현악 단원, 문인, 교사, 만철 기술자들ㅡ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만주 체류는 곧 친일을 의미했다. 만주의 공백은 사람과 사물의 자연적 소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억제와 침묵이 빚은 것이다. 만주는 욕망의 대상이요, 은닉의 상자였다. 이제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힐 때가 되지 않았는가?˝
-449~450쪽- <8장 맺으며: 식민과 변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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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 읽고 나서 문단 둘 고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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