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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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그림이나 사람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무언가, 혹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사물은 존재가치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본래 타인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 보여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초상화와 그림이란 사진이나 거울과는 달리 단지 반사나 껍데기를 담아 놓는 게 아닌 그 사람의 인간 자체의 생명의 온기가 들어있다. 그는 초상화를 통해 타인을 그리고 타인을 찾아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을 잃어버리고 선택하지 않은 자신만이 있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물리적인 반사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은 진짜 사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선택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그림들이 나오게 됨으로 인하여 혼돈을 겪는다.

'나'는 자신만의 작품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뜻밖에도 그의 재능은 타인의 얼굴을 일정한 방식으로 찍어내는 기술적인 초상화의 영역에 재능을 가졌다.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특수성을 잃어버린 채 이미 같은 얼굴을 가져 얼굴이 없는 초상화를 복사하는 생활에 물들었다. 사실 그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바다보다 매 순간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새로움과 사물의 변혁, 특수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초상화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특징을 잃어버렸다. 그는 사람의 인생을 요약하여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언어 습관조차도 상대방의 말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버릇이다. 그는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기보다 정리하고 그대로 요약하며 반복한다. 변함없이 반복되고 특징이 없는 그에 질린 그의 아내는 그를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9개월의 기간 동안 찾은 산장에서 그는 물리적 일정함과 기준이 흐트러지는 체험을 한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장면 '기사단장 죽이기'를 일본의 화풍으로 번역해 그려놓았다. 번역이란 해당 작품의 복제가 아니다. 번역은 다른 문화, 다른 기술로 만들어 놓은 작품을 해당 언어와 문화에 어울리게 해석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롭게 해석한 예술품, 또는 작품은 그 자신으로 가치를 지니며 존재의 필요가 된다. 거울이나 사진의 물리적인 반사가 아닌, 새로운 그림과 작품이 된다. 초상화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얼굴과 본연을 끄집어 내어 새로운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들어 놓는 창조적인 작업인 것이다. '나'는 상대방의 내면을 파악해 그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만큼,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적인 반복에 의한 그림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인간을 통한 독립적인 창조물이다.

일본화는 특정한 도구를 사용하며 일본화의 정신성을 중요시하지만 서양화의 난입에 의해 생활물품에서 예술품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탓에 고정된 틀이 없이 자유롭다. 초상화는 상대방의 영혼을 깎아 그림에 집어넣어 영속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자면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결정적인 정신세계가 그림에 표현되어야 한다. 내면을 찾아 넣는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자신도 모르는 것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가 그동안 해온 프로 초상화 작가로서의, 상대방이 원하는 무언가를 그리는 게 아니라, 멘시키의 여러 모습을 작가의 내면에서 찾아 그대로 표현하게 되었다. 즉, 진정한 상대의 정신적 세계를 발견하는 건 상대방이 아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는 것을 상대와의 관계속에서 알아내고 땅속 방울의 울림처럼 내면에서 듣고 찾아내어 자신의 내면세계 속 무의식 속에 특수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본화에서 중요한 건 여백이다. 여백이 그림을 결정하고 사용하지 않은 공간에 따라 변화한다. 돌고래는 좌우의 뇌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며 여백을 주고, '나'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여백이 없는 멘시키와 같은 삶은 포석을 두며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며 머리와 사물을 총동원해 여지와 여유를 없앤다. 때문에 그는 다른 것과 사람을 때로는 부러워하고 숨기고 자아를 시종일관 움직여 자신에 대한 불안을 없앤다. 자아가 고정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공간이 필요하다.

현실과 비현실은 미묘한 경계선에 존재한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녹아떨어지는 것고 태양을 향해 얼마나 날아가느냐에 있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을 때도 어둠이 주는 공포에 먹히면 공포가 되고, 먹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자기만을 위한 방이 된다. 양면이 주는 경계선이란 땅에 산 채로 묻어질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죽지 않은 채로 죽음에 가까워지기만 할 때의 공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 존재한다. 알게 됨으로 흔들리지 않는 진실에 받는 충격보다, 모르기 때문에 흔들리며 불안정함이 더 필요한 상황이 있다. 그리고 그 사물의 본질은 꼭 언어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화 그림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바람직하며, 은유와 암호조차도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는 게 좋다. 구덩이에 들어간 멘시키를 가두어두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는 그는 누군가를 이기려 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는 힘들어하기는 하지만 나름의 돌파 방법을 가지고 있고 타인의 진정한 내면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얻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가 가진 그림이나 사물의 내면을 바라보는 법,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 등 그는 타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상대방을 읽고 타인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표현된다는 건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모르는 게 더 좋은 자신의 모습이 있기도 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의식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형태의 완성형이다. 이데아는 인식 저편에 보이지 않지만 보여야 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으며 하루키는 그를 인간 각자의 주관에 따라 인과의 흐름에 맞추어 귀결되는 정신세계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유물론적인 물질과 관계없이 이데아로서의 정신세계가 들어 있으며, 주인공은 그 이데아의 모습을 보고, 거울 저편에 있는 그 사람의 진실된 모습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다. 유물론적 세계관의 끝에 있는 사람은 멘시키이고, 그는 그런 '나'를 마음 한켠으로 부러워한다.

작가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세계 속에서 2차 세계대전과 난징 대학살을 겪으며 애인과 동생을 잃고 고문을 당한다. 그에 따라 도모히코는 자신의 생명을 담아 일본화된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동생을 잃어버린 '나'는 인과에 이끌려 도모히코의 집에 들어와 '기사단장 죽이기'와 '이데아'를 꺼내버린다. 그 과정에서 그린 멘시키의 초상화와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마리에와의 만남 또한 인과에 의해 발생되었으며 기사단장을 칼로 찌르고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를 만나는 것 또한 그 과정에서 마주해야 할 '나'의 또 다른 정신세계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독특성에 대한 깨달음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었고, 아마다 마사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와의 만남은 그에게 특수한 경험과 의미를 주었지만, 오히려 그가 알게 된 건 현실과 증명할 수 있는 현상, 아내인 유즈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에 현실의 의미를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마리에에게도 마찬가지다. 난징대학살의 고통을 담은 마시히코의 그림은 생령을 불러올 만큼 거대한 담론이 되고 진실은 여전히 꺼내지지 않지만 시공을 뛰어넘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인과에 따라 의미를 가진다. 감추어져 있지만 표현되고 싶은 사실이 있고, 표시되어 있지만 감추고 싶은 사실도 있다. 또한 감추어져 있는 걸 꺼내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이데아의 근원이 타인의 의식에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또 다른 이면과 진실, 감추어진 사실도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읽고 인식된다면 그걸 사라지게 만들거나 없던 일로 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 때문에 중요한 건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알아야 하는 것과,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진실이 드러날 때를 알아보는 것 말이다. 사실을 아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만큼의 위험부담이 따른다.

'나'는 부담과 이데아, 메타포의 상황에 시달리다 다시 현실로 들어가지만 그 현실은 사건 발생 전의 과거와는 다르다. 그는 사물과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는 자신을 깨닫고 있고, 덮어둔 그림도 언젠가는 다시 꺼내서 그릴 것이다. 인지된 사실은 결코 인지가 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반대로 뒤바뀌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벌어지지 않지만 개인이 멈추지 않는다면 인과에 따라 세상은 어느덧 모습을 바꾼다. 그럼에도 역시 인생도, 인간도 어디까지나 완성되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현상을 덮어 놓아도 그 안에 진실된 이데아는 제 모습을 한 채 숨어 눈을 뜨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방울 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내면을 바라보고 표현하려는 개인의 노력과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바라봄이다. 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전과 조금은 바뀐 채로 새롭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게 기사단장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해 어느 땐가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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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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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고민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우주의 규모를 따진다면 인간의 부질없음은 더욱 대두된다.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건 인도의 역사에 있어서 불행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여러 커다란 사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수많은 인간을 휘두르고 인간의 방향키를 옮긴다.

그럼에도 커다란 변화와 불행이 나의 작은 불행을 무감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느껴지며 같은 무게를 지니고, 계급이나 경제상황, 여러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더 의미 있거나 귀중하지는 않다. 작고 사소한 개인의 삶도 그에게는 영원이고 전부이며,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다. 우주의 크기는 개인의 크기와 동일하다. 인식되는 범위와 나의 고통, 행복이 곧 우주의 고통이자 행복이며 누구도 그를 쉽게 재단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

인간은 모두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불행한 개인은 불행을 벗기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끌어온다. 불행한 누군가를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누군가를 바라보며 억울해한다. 타인과 관계하고 마음의 상대적 크기를 가늠하는 한 인간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카스트제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서도 그들은 차별을 받으며 카스트 제도의 보조마저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고난을 떠나 새로운 고난에 빠진 것과 다름이 없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쓰임 역시 제도를 떠나 만인의 평등을 추구하기 위함이었으나 제대로 활용되지도, 평등해지지도 않았다. 성차별과 제도의 차별 속에 낮은 계급, 그 안에서도 여자는 더더욱 당연한 불평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역사도 중요하고 세상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건 개인의 역사가 되는 각자의 삶과 사랑이다. 개인의 사랑과 삶이 역사와 세상의 기준에 먹혀 사라진다면 그건 바르지 않다. 세상이 무엇이든, 계급이 무엇이든, 인간을 평가절하하고 나누어 분류할 자격을 갖추진 않았다. 작은 것들은 작은 채로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비겁하고 타인을 분류해 집어넣는다. 그 안에서 큰 것은 작은 것을 지우고, 작은 것은 그보다 더 작은 것을 지운다. 가촉민과 불가촉천민, 그리고 그 개념조차 모른 채 살아간 자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세상은 괴물을 낳고, 괴물은 곧 인간이 되어 자신이 괴물이 된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거울을 볼 생각이 없는 그 괴물은 앞으로도 자신이 괴물인지 알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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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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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샹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에 해당하는 진실을 목도했을 때 삶, 또는 죽음을 건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을 병들게 하는, 이 존재의 이유에서 나오는 사람의 마음에 박힌 벌레를 찾아야한다. 그러한 존재에 대한 고민에 대해 사회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다.

부조리는 관심에서 시작되고 낯설게 다가오는 세상과 타인과의 거리를 느끼게 하는 두꺼움이 부조리가 된다. 이 낯섦과 두꺼움을 통해 인간은 비인간적인 풍모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이 부조리의 근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에 세상이 비합리적으로 침묵할 때 생겨난다.

인간은 누구나 나이들어가고, 너무도 많은 이유에 따라 죽는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나중에 알게 된다는 식의 위로는 너무도 터무니 없다. 그러므로 가까워지는 죽음에 대응하기 위해 인간은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하지만, 죽음이란 직접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 수학적으로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는 죽음의 측면이 부조리의 감정이 된다. 인간은 무지하고 세상을 명확히 알지 못 한다. 단 한순간도 알 수 없는 진리의 모습은 인간의 부조리의 감정을 키운다.

부조리는 현실과, 자신의 바람의 근간이 되는 초월적인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 초월적 현실은 주어질 수 없기에 인간이 부조리를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 뿐이다. 카뮈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루어내는 부조리의 탐구는 자신을 깔아뭉개는 것 자체를 그대로 생각하고, 그 존재의 본질을 존중하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고, 부조리와 투쟁할 수 있다.

인간이 한가지의 진실에 빠져버린다면 그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윽고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 신은 인간이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허무하다. 이윽고 부조리는 신이 되어 버린다. 인간이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상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보다 차라리 부조리의 절망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단호한 정신은 그를 잘 견디어 낼 수 있다. 이 이성을 통한 실존적인 태도는 일종의 '철학적 자살'이다.

카뮈는 인생이 의미가 없을수록 더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인생에 의미가 주어지고, 이성이 커져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그와 동시에 주어지는 부조리들을 감당하게 어려울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부조리를 주시하고, 부조리가 만들어지는 걸 눈앞에서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형이상학적인 반항을 의식 전반에 깔아놓는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부조리와 이성과의 관계이자 반항이고,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반면 자살은 한계점의 수용에 이른 행위라 볼 수 있다. 반항은 곧 자유이고, 그를 최대한 많이 느끼는 게 살아가는 것이다. 카뮈는 절대로 관조적인 사람이라 볼 수 없다. 그는 반항과 자유, 열정을 토대로 수용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길과 싸워나가기를 바란다. 죽음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영원도, 영속성에 대한 논의도 의미가 없다.

죽음이 두려운 이후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미지이기 때문이다. 깨달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를 이겨내기 위해 생겨난 것들이 종교와 신이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에서 오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삶과 밀접한 것들을 관장하는 신을 만들었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신을 존재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음 이후의 세계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 이외에 실존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원이니, 진리이니 떠들어봐야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게 카뮈의 의견이다. 때문에 이러한 부조리를 예술이나 철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존재는 허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다.

무엇이든 존재할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을수도 있다. 개인의 삶이란 얼마든지 가치가 없고 의미 없을 수도 있다. 평생에 걸쳐 예술을 할지라도 그 예술이 한순간 가치 없어질수도 있다. 인간은 이를 인정한 채 부조리에 반항하며 열정을 퍼부어 죽음 이외의 모든 것들에 대한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시지프는 끝도 없이 떨어지는 돌덩이를 다시 위로 올린다. 이처럼 무용하며 의미 없는 행동안 영원토록 시지프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로 돌을 올리는 순간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돌을 바라보며 다시 밑을 향해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는 의식의 순간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고뇌와 노력의 시간들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가치 있게 한다. 이 돌덩이는 우리의 고뇌, 그리고 인생과 같다. 인간은 삶을 통해 시지프와 같은 형벌을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지는 고민과 자유를 향한, 깨어 있는 의식의 투쟁은 부조리를 통해 우리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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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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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첫 줄의 이 한 문장만으로도 요조는 실격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스스로를 끔찍한 인간, 타인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권유를 처음 거절해본 게 살면서 단 한 번일 정도로 타인의 마음을 신경 쓴다. 그는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역할을 온전히 하려고 애쓴다. 다만 그는 너무나 예민하고 과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 그를 신경쇠약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가 가진 불안정한 마음의 근원은 스스로에게 제대로 붙지 못한 자신감, 그리고 타인과 잘 지내보겠다는 생각이다. 

안하무인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넘친다. 그들은 타인의 마음이나 생각, 곤란함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타인에게 피해가 되는 일이라도 본인이 필요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한다. 타인에 대한 신경이 무딘 그들은 뒤통수, 또는 배를 칼로 푹푹 쑤셔 넣는다. 죄책감 같은 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심정은 애초에 염두에 넣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에게 조금의 피해를 주는 사람을 경멸하고 비난한다. 

요조는 타인을 신뢰한다. 스스로가 기준 이하의 한심한 인간이기 때문에 타인을 비난하지 않는다. 누군가 요조를 비난하더라도 요조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부정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다. 때문에 요조는 괴롭다.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고 그 불행을 만드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놓을 수 없다. 괴로운 그는 외친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가 죄인가요?"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요?" 요시코에게 하는 이 이야기는 사실 그 자신의 모습을 보고 뱉는 말이다. 

스스로를 최저의 인간이라고 비난하는 요조와 자신은 옳고 타인은 그르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 누가 실격 대상인 인간일까? 요조는 예민하고, 부족한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는 안쓰러운 사람에 불과하다. 

마지막 문단 마담이 말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에요.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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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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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준이 바라는 삶은 단단함 속에 젖어들어가는 삶, 세상이 혼란스럽게 돌아갈지라도 마음을 쏟아 낼 수 있는 삶이다. 자그마한 앎을 가지기 보다 마음의 믿음을 뿌리로 삼아, 깨어지고 다치고 정강이가 벗겨지더라도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늙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명준은 그만큼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존재를 찾고 있으나 그의 눈에 채이는 것이 없다.

광장은 공유의 공간이며 모두를 보호해야 하는 곳이다. 탁 트인 광장은 모두가 함께하고, 모두가 모두를 볼 수 있고, 때에 따라 자유롭게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은 광장에서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만든다. 정치에서 나오는 오물은 치워지지 않고 경제는 교활하며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화조가 만들어지고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며 치안이 있어야 하지만, 혼탁한 광장은 마치 짐승의 세상과도 같다. 사람들은 광장에 나가지 않고 밀실에 들어가 개미처럼 물건을 물어다 방안에 쌓아 놓는다.  광장은 개인과 개인을 잇는 공간이자 출구다. 권력자들은 광장을 흐려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밀실의 문을 부수어 개인을 죽이려 한다. 한국의 광장은 그렇게 죽어 있다.

정치와 법,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광장은 개인을 보호하기보다 개인의 충성도를 높여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리고 그 국가를 움직이는 건 몇 명의 부르주아와 권력을 가진 세력이다. 개인이 편하게 살기 위한 방법은 국가의 가르침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고민과 사고, 개인의 목적이 뚜렷할수록 삶은 괴로움을 더한다. 철학을 전공한 명준이 바라는 건 개인이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서 개개인의 존재를 발하며, 스스로 그를 이룩하기 위해 불타는 열정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쇠약하고 유약하며, 국가를 자신과 떨어뜨려 생각하는 자아를 갖춘 명준은 국가에게는 처리 대상에 불과했다. 인민을 위한다는 북한도 역시 실상은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을 통해 인민을 통해, 인민을 위한  정부를 이야기했으나, 북한은 그저 마르크스의 이론을 사회주의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뿐이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 개개인을 광장으로 이끌어 내지 않고 장기말로 둔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타인을 돌아보지 못한다. 오직 자신의 삶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이 높아지기를 바란다.

명준이 바라는 불타는 삶을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광장의 존재와, 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스템은 가능할 수 있을까? 그리고 명준은 그저 원망으로만 만들어져 있는 태도에 정당할 수 있을까? 사회는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볼셰비키의 혁명은 소수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프랑스 시민혁명도 모든 사람을 위한 혁명은 아니었다. 결국 혁명이란 진정 아래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집단이 상위의 특정한 집단을 갈아치우기 위해 사용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자아를 가진 주인이 되는 세상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그만큼의 자아를 사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은 그저 끼니를 걱정하며 오늘의 밥을 잘 먹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명준은 자아를 지닌 지식인으로서 본인이 목표로 하는 불타는 삶을 위한 행동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명준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단지 자신에게 온 마음을 열어 사랑해주는 여자를 바라는, 사랑을 쫓는 남자일 뿐이다. 개인은 개인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개인과 집단에 대한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광장은 밀실이라는 안전한 개인의 공간에 적을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명준이 가진 "불태우고 싶은" 공익의 광장의 존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는 고찰을 거듭한다. 명준이 진정 바라는 건 이념에 얽매이지 않는, 육체와 정신을 함께 하는 완성적 사랑인 것이다. 그가 바라는 광장은 모두가 존중받으며 모두를 보호하는 광장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공간을 지키고 그 공간에 들어오는 모두가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개인의 밀실로서의 광장이었다. 바뀌어버린 명준의 광장에 대한 정의를 쇠락이나 쇠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그가 남한에서 계속 살아남았다면, 또는 4.19 혁명과 6월 항쟁을 겪었다면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는 미지수로 남지만 그는 완성되지 않는 광장을 바라보며 개인주의적인 남한과 공산당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조종하는 북한의 모습에 낙심했을 것이다. 그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온 바다를 돌아다니는 갈매기를 보며 모두를 포용하는 광장이 다름 아닌 바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은혜의 모습을 닮은 모성의 바다는 명준이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세상의 광장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테지만 마음을 다해 태울 수 있는 명준의 광장은 완성된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스륵 아쉬움이 남는다. 애당초 명준이 바랐던 광장은 언젠가는 완성될 수 있는 걸까?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던 최인훈 선생님의 결론을 2018년이 된 지금도 부정할 수 없다는 건 사실 꽤나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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