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의 몰락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4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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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포자'라는 말이 있는데...

국사를 포기한 자...ㅎㅎ 내가 고3때 국포자였다! 우하하하

자랑은 아니지만, 국사를 정말정말 못했었다. 그냥 외우기만 하면 되는 걸 왜 못했냐, 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어쨋든 국사는 성적이 정말 안 나왔고 그때문에 하기도 싫었다!

고2 겨울방학 내내 국사를 팠지만 고3 3월 모의고사에서 반타작을 하고 그대로 국사책을 버렸다... 이건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더이상 했다가는 미쳐버릴 거 같아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훌쩍 지나버린 지금,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면 국사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국사뿐 아니라 세계사 수업도 열심히 들을 것이다. 진짜진짜!! 왜 갑자기 창피한 고등학교 얘기를 하냐 하면, 최근에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작품 <거인들의 몰락> 1,2권을 읽었기 때문이다...ㅎ <대지의 기둥>의 작가 켄 폴릿의 작품! 20세기 시리즈 첫번째 이야기다. 1부인 <거인들의 몰락>을 시작으로 2,3부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대지의 기둥>을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이번 작품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게 웬걸,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루었다고 하니까 겁부터 났다. 워낙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이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은 분명 있을 것이다! 분명 재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작가의 이야기를 잘 따라갈 수 있을 것인지, 숨어 있는 의미들을 내가 역사를 1도 몰라서 못알아채는 게 아닐지, 다 읽고 나서도 끝난지 모르는 게 아닐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1권 680쪽, 2권 640쪽,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켓 폴릿은 역시나 잘 끌어가주었고, 친절한 서사 덕분에 나 같은 세계사 모지리도 즐겁게 빠져들 수 있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비슷한 형식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파리와 런던, 두 도시를 왔다갔다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란 큰 배경 속에 인생을 녹여냈다면, <거인들의 몰락>은 총5개국을 왔다갔다하면서 전쟁이 뒤집어놓은 사람들의 일상,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여성 참정권의 문제와 상류층에 반하는 농민들의 반란들까지 골고루 선보인다.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웨일스를 넘나드는 스펙터클한 이야기에 빠져들면 웨일스의 탄광마을에서부터 영국의 귀족 저택, 러시아의 밑바닥 인생까지 눈앞에 훤하게 펼쳐지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총 백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에 실존인물 이십여 명까지 더해져 100년 전 일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말을 보니까 실존인물들의 대사는 그 사람이 진짜로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명의 감수를 거쳐서 역사적 고증까지 완벽하다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을 읽어서 역사 포기자인 내가 한순간에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이제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 '전쟁'이 나온다고 하면 딱 영화 <어톤먼트> 수준? 그냥 전쟁 때문에 피폐해진 인간상을 보는 데 그쳤는데, 좀더 본격적으로 전쟁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볼 수도 있겠다, 는 생각도 들었다. '20세기 시리즈' 첫번째 이야기인 <거인들의 몰락>을 읽으며 아주 즐거운 경험을 했으니, 뒤에 이어질 <세계의 겨울>과 <영원의 끝>도 굉장히 기대가 된다!!  


격변의 시대를 몸소 살아낸 듯한 최상급의 켄 폴릿, <거인들의 몰락>이 역사 포기자의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주었다, 이제 역사에 막연한 두려움은 없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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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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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을 읽을 때면, 늘 소녀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중학교 다녔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라이트노벨과 순문학을 넘나드는 작가 사쿠라바 가즈키가 쓴 성장소설 <고야>는 표지부터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싱그러운 연두색 바탕에 비누방울, 그리고 소녀의 뒷모습.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비눗방울이 그 소녀 시절의 위태로움을 나타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주인공인 '고야'는 어딘가 바람둥이인 아빠와 집안일을 해주는 아줌마, 셋이 산다. 그러다 처음으로 신경쓰이는 남자아이를 만난다. 알고보니 고야의 아빠가 새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아들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남자아이와 이복남매가 되어버린 것이다. 고야의 청소년기는 이렇게 위태롭게 시작한다. 여색을 밝히는 아빠와 다정하지만 거리가 느껴지는 새엄마, 거기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애. 보통의 아이라면 분명 비뚤어지거나 어두워질 만한 환경에 던져졌는데 고야는 스스로의 페이스를 지킨다. 어디서든 튀지 않게 행동하던 고야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바람 잘 날이 없는 사춘기의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고야도 서서히 앳된 티를 벗어간다. 천천히 아주 쉴새없이 시간은 흐르고 고야는 앳된 모습을 서서히 벗어간다. 사쿠라바 가즈키가 소녀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해낸 것 같다. 딱 그 시절의 소녀를 어쩜 이렇게 그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그려냈을까. 이 소설을 읽는 소녀들은 고야가 점차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제 막 가슴이 봉긋하게 올라온 앳된 소녀 고야부터, 이제 어른 티가 나는 고야까지. 어린 소녀의 성장과정을 찬찬히 지켜본 것 같다.


미래의 일 따위, 어떤 직업을 얻고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 뿐만 아니라 어떤 남자가 될지 어떤 여자가 될지조차 아직 전혀 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고야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른의 연애소설에 적힌 이런 저주스러운 일들이 미래에 고야에게도 닥쳐올까. 요코라는 소녀를 가차 없이 바꿔버렸듯.


나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려본다.


내 중학교 시절은 어땠었을까. 난 고야처럼 얌전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늘 드라마를 만들어서 기가 막히게 짜인 스토리 안에서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하느라 바빴었다. 하루하루가 드라마였고 영화였고 일본 청춘만화였다. 신체의 변화가 왔을 때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해 숨기기에 급급했고 남자애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유치할 정도로 그 아이를 놀려댔다. 가정의 사소한 불화도 크게 받아들여 친구들에게 위로 받았고 엄마의 걱정어린 잔소리에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내 시간은 위태위태하고 빠르게, 그리고 쉴새없이 흘렀다.


고야의 시간도, 나의 시간도 똑같이 흘러갔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는 이러한 형태의 어른이 되었고, 고야도 그러한 형태의 어른이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떠한 형태의 어른이 된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된다.

미래의 일 따위, 어떤 직업을 얻고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 뿐만 아니라 어떤 남자가 될지 어떤 여자가 될지조차 아직 전혀 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고야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른의 연애소설에 적힌 이런 저주스러운 일들이 미래에 고야에게도 닥쳐올까. 요코라는 소녀를 가차 없이 바꿔버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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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의 시계장치
마티아스 말지외 지음, 임희근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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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책은 아주 많다. 풋풋한 사랑부터 농염한 사랑까지, 사랑을 빼놓고는 문학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흔한 소재이지만 여기, 조금 특별한 사랑이 있다. 근육으로 만든 심장으로 하는 사랑말고 시계로 만든 심장으로 하는 사랑.




매들린이라는 어딘가 수상한 여자의 집에 임신한 어린 여자가 찾아온다. 그 여자는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심장이 뛰질 않았다. 매들린은 그 남자아이의 심장에 시계장치를 달아 심장이 움직이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남자아이의 엄마는 사라져버렸고, 매들린은 그 남자아이를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그렇게 잭은 심장에 똑딱거리는 시계장치를 달고 살아가게 된다.


"네 작은 가슴에 사랑은 위험하단다......"


사랑으로 심장이 뛰게되면 잭의 시계장치가 위험해진다고 매들린은 잭에게 늘 당부했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든 잭 역시 사랑에 빠진다. 노래를 부르는 미스 아카시아에 한눈에 반해 그의 심장은 미친듯이 똑딱거리고 열까지 난다.


첫째, 시곗바늘을 건드리지 말 것.

둘째, 화가 치밀어도 꾹 참을 것.

셋째, 절대로,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말 것. 사랑에 빠지면 심장시계의 김 바늘이 네 몸을 뚫고 나오고, 뼈는 산산이 부서지고 심장의 시계장치는 다시 고장나버릴 테니까.


언제 마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인 적이 있던가. 잭의 마음은 미친듯이 미스 아카시아를 향한다. 무모할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들던 잭은 불의의 사고로 다른 사람에게 큰 상해를 입히고 경찰한테 붙잡히기 전에 미스 아카시아가 있다던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잭은 다시 미스 아카시아를 만나 불 같은 사랑에 빠지고만다. 사랑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약점을 갖고 있다. 잭은 심장에 시계장치가 달려 있고, 미스 아카시아는 눈이 매우 나빠서 안경을 껴야 한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한다. 서로의 단점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이 단점은 그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이 게임에서 네게 가장 중요한 패는 바로 네 심장이야. 넌 그게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연약함을 감수하고 네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넌 그 심장시계 덕분에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어. 네 남다른 점이 널 매력 넘치는 존재로 만들어 줄거라고!"


사랑에 빠져 무모해진 이 둘의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심장의 시계장치는 조금만 심장이 세게 뛰어도 째깍째깍 거리고 뻐꾸기까지 울어댄다. 연인 앞에 선 우리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는 걸 조금 과장해서 말한 것 같다. 잭이 겪는 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유혹하는 모습, 갑자기 등장한 남자를 경계하고 연인을 의심하는 모습까지. 잭 말고 다른 등장인물들도 각자 현실적인 사랑의 형태를 대변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사랑만 해야 하는 창녀, 늘 죽은 여자들만 사랑하는 살인마, 꿈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마술사까지.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조금 괴이하고 어딘가 서글픈 이 소설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올 8월에 개봉한다고 한다. 작가의 마법 같은 상상력을 그대로 표현해준 소설의 일러스트와 또다른 매력을 선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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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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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우엘벡과 첫 만남은 아찔했다. 대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추천해주셔서 도서관에 있던 <소립자>를 읽었다. 혀를 내둘르며 덮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런 게 프랑스 문학이란 말이가. 변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애 장면은 노골적이었다. 요새 말로 '후방주의'라는 경고문구가 붙어 있어야 할 책이었다. 혹, 이 책을 읽었던 누가 지하철에서 <소립자>를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미셸 우엘벡하면 손을 내저었다. 다신 읽지 않으리라!


그러다 올해 초, 미셸 우엘벡의 문제적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책장에 꽂아두었던 <지도와 영토>를 펼쳤다. 신작을 읽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놓자는 생각이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지도와 영토>는 <소립자>와는 또다른 충격이었다. 미셸 우엘벡은 이 방대한 지식을 어떻게 얻었단 말인가. 또 철학에도 조예가 깊다니. 충격적이었다. 여전히 성애장면은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지도와 영토> 속 미셸 우엘벡은 그저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괴팍한 노인네이자 지적임으로 충만한 예술가였다. 거기다가 간간이 블랙유머까지.


세번째 만남은 이번 신작, <복종>이다. 올해 초 세상은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시끄러웠다.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문제가 대두되면서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선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이 책도 유럽 전역을 휩쓸다시피 했다. 2015년 7월, 한국에도 <복종>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이 되었고, 그렇게 미셸 우엘벡과 세번째 만남이 시작되었다.


역시, 백과사전 같은 우엘벡 만의 서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이 불문학 교수라는 설정 덕분에 프랑스의 유명 시인에 대한 서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또 여전히 문학에 대한 우엘벡 만의 철학도 등장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책은,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 우리가 만나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작가의 책이다.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는 한 가지가 독서라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우엘벡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프랑스 사회의 모습은 현실적이다. 그럴싸하다. 서서히 사회는 무슬림에게 잠식당한다. 어느 순간, 확 바뀐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물들어간다. 그러다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성의 상징은 대학들마저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자들은 히잡을 둘러쓰게 되고, 집안에만 묶이게 된다. 그러면서 남성들 취업률이 높아지게 되고 사회는 어딘가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다. 일부다처제가 들어오면서 남자들은 원래 함께 살던 부인에, 새로 얻게된 어린 부인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지성을 이끌어 가던 대학의 교수들마저 연봉이 높아진다는 소리에, 교수직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에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부인을 두셋 거느리게 된다. 결국 차가운 시선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주인공인 프랑수아 마저 '복종'하고만다.


작품은 이슬람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온건한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회적 갈등이 해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공포가 은연중에 잠식해 있던 유럽 사회에서 이 소설이 더 논란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섬뜩한 소설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아직 미지수다. 유럽보다 이슬람에 대한 공포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정권을 다른 문화권이 장악했다고 생각해보라. 좀더 격하게 상상해보자면 (그럴 리 없겠지만) 북한의 정권이 우리 사회를 장악했다고... 생각해보면 <복종>이란 작품이 더 섬뜩하게 와닿을 수도 있다. 결국 타 정권에 무릎을 꿇어버리는 우리들의 모습. 



조금은 이런 식으로 몇 년 전에 내 아버지가 혜택을 입었듯, 내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삶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두번째 삶의 기회가 되리라.

후회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 2022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현대의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평을 받으며 조지 오웰의 <1984>와 비견된다. 빅브라더를 사랑한다는 1984와 후회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는 <복종>. 시니컬한 미셸 우엘벡은 나에게, 또 우리에게 아주 묵직한 펀치를 던지며 <복종>을 마무리지었다. 그에게 제대로 한방 맞은 나는 어느새 미셸 우엘벡과 네번째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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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라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양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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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면 마를수록 기뻤다. 튀어나온 뼈를 바라보고 어루만지며 황홀해했다. 창백한 안색도, 텅 빈 눈이 어울리는 생기 없는 얼굴도 전부 기뻤다. 그가 찍고 싶어하는 건 뼈도 아니고 인형도 아닌, 인간이 감정과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 그 자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 사진 작가의 작품집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모델 사키. 애인인 사진 작가의 집에서 함께 살지만 그와 사귄다고도 말도 못하는 신세다. 애인은 사키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지도 않고, 애정 담긴 눈빛으로 쳐다봐주지도 않는다. 욕구를 배설하는 변기처럼 성욕만 채우고 만다. 그에게 애정을 키우던 사키는 거식증을 앓는다. 음식을 잔뜩 사다가 씹고 뱉는 일상. 사키 자신도 괴롭지만 그가 다른 모델을 찍는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 밴드의 보컬을 소개받는다. 마쓰키라는 그 보컬은 사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녀를 있는 그래도 사랑해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쓰키와 그녀를 변기처럼 취급하는 사진 작가 사이에서 사키는 괴로워한다.



나는 울었다. 그의 목소리와 노래는 내게 가르쳐준다. 이 세상에 구원이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 골으로 그와 내가 연결된다는 것을.

위험한 사랑 중독에 빠진 젊은 여성을 담은 이 작품은, 작가가 집필중 곡기를 끊어 통원치료를 했다고 밝힐 정도로 목숨을 바쳐 집필한 것이다. 구원의 손을 잡았다가도 스스로 그 손을 놓는 여성의 모습은 정신병에 걸린 것 같다. 이미 변기의 삶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광기의 애증. 머리를 잘라내도 끊임없이 머리가 자라나 끝내 죽지 않는 히드라라는 괴물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식과 스스로를 내던지는 고통.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나방 같은 한 여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 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거식을 하면서, 자신을 숨기고 상대가 사랑할 만한 모습을 연기하며 사랑을 갈구해야 하는가.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충분히 두려운 일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나를 드러내야 하는 것인가. 가네하라 히토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고통스런 질문을 던지며 이 작품을 끝맺는다.



뱃속에 음식물이 들어 있는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죄악감은 내 안에서 꿈틀댔다. 나는 죄악감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죄악감을 느끼면서도 자기 파괴를 멈출 수 없는 사키의 모습을 보니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하이드라>에서는 '거식'이라는 극단적인 파괴방식이 등장했지만 우리도 작게나마 자기 파괴적 행위를 할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상대에게 하는 사소한 거짓말도 자신의 정직을 파괴하는 방식이니. 삶을 사는 내내 우리는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짓을 해도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해줄 것인가?' '이건 내 진짜 모습이 아닌데,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 이 사람이 떠나지 않을까?' 하지만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줄 만큼 그릇이 큰 사람임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내 쪽에서 떠나는 것이 맞다. <하이드라>의 사키는 자신을 믿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밀어넣었다. 자기애를 키워서 내 안목을 믿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믿어야 한다. 사랑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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