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했다. 마치 사물들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게 속삭이는 것처럼, 애정을 겉으로 그러내지 않고. 당신은 아주 은밀하게 나를 사랑했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 사랑은 너무도 강해서--명명백백한 사실의 힘--당신은 그걸 동네방네 떠들어대지 않았을 것이다.
_에릭 포토리노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과묵함이 미덕이었던 우리나라에서만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사랑한다 말을 안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아버지들은 늘 과묵했나보다. 페미나상 수상 작가 에릭 포토리노의 자전적 에세이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에 나오는 아버지도 과목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그냥 웃고마는 아버지였다.
작가의 엄마는 미혼모였다. 엄마의 집에서 친부의 배경을 이애하지 못했고, 결국 엄마는 에릭 포토리노를 9살 때까지 혼자 키웠다. 그러다 9살 때, 엄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고, 작가는 엄마와 그 남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짐작했다.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임을. 9살 때 갑자기 아버지가 생긴 에릭 포토리노는 그의 모습을 작품속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갑자기 생긴 아버지라는 모티프는 작가의 다른 소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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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정말로 원한다면 내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말했다. "날 아빠라고 불러도 돼. 넌 내 성을 가지게 될 테니까." 그는 소년의 뺨을 톡톡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릭 포토리노의 『미셸』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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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셀은 아이들을 대하는 것에 완전히 서툰 사람이라 뜸을 들이기보다는 단숨에 모든 걸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내친김에 계속 말했다. 프랑수아가 원한다면 앞으로 그의 성은 시뇨렐리가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 세 사람은 한 가족이 될 거라고. 에릭 포토리노의 『코르사코프 증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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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등장한 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진다.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아버지. 에릭 포토리노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떠나보낸다. 갑자기 등장한 아버지와 은밀하게 사랑을 나눈다. 친아버지도 아닌데 서로를 가장 이해했고, 서로를 가장 아꼈다. 엄마와 헤어진 뒤에도 아버지의 거대한 사랑은 계속 되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엄마의 사랑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엄마의 사랑이라고 하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애롭고 푸근한, 파스텔톤의 그림인데,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면, 회색, 은색으로 그린 그림이 떠오른다.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뒤에서 든든하게 우리를 받쳐주는 색.
아들과 아버지의 사랑은 내가 경험해볼 수는 없지만. 내 남동생과 아빠를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아빠와 남동생은 가끔 둘만 나가서 영화도 보고, 옷도 사고, 맛있는 밥도 먹고 오는데 말 없는 그 두 남자가 단 둘이 있으면 뭐하나, 궁금했다. 남동생한테 물어보면 '그냥 같이 다니는 거지 뭐' 이러는데 아무래도 분명 둘이 말 없이 올 게 뻔하다. 옷을 사왔다 그래서 아빠가 골라줬냐고 물으면 '그냥 같이 샀어' 뭐 먹었냐고, 고기 먹었냐고 물으면 '그냥 아무거나 먹었어' 무슨 얘기했냐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냐고 물으면 '별말 안 해, 그냥 얘기하지 뭐'
아들과 아버지의 사랑은 진짜 알 수 없을 일이다. 그래놓고 이렇게 구구절절한 작품을 써낼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