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병사와 함께한 여름
베티 그린 지음, 권혜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만약, 일제의 탄압에서 간신히 벗어난 한국에서

어린 소녀가 일본 군인과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면,

우린 그 소녀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베티 그린의 『독일 병사와 함께한 여름』 속 설정, 유대인 소녀와 독일군의 우정이라는 주제를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상황에 맞춰 상상해보았다. 1973년, 이 작품이 출간될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지,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대인인 소녀 패티 버건은 하루하루 간신히 살아낸다. 백화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아빠는 난폭한 성향이라 패티에게 툭하면 손찌검을 했다. 패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바로 허리띠를 풀러 휘둘러댔다. 허영심이 많은 엄마는 예쁘장하고 애교 많은 둘째 샤론만 예뻐한다. 패티는 엄마아빠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반, 벗어나고 싶은 마음 반이다. 인정받고 싶어서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내지만 결국 엄마아빠에게 돌아오는 건 무관심한 눈빛이다. 그런 패티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건 흑인 유모 루스뿐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외톨이였던 패티는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마을에 와 있는 독일 포로들이 모자를 사러 패티네 백화점에 오게 된다. 우연히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포로 안톤과 이야기하게 된 패티는 독일군이 생각보다 선하고 똑똑하다는 점에 놀란다. 독일군은 악마 같이 생겼다고 들었지만 오히려 잘생긴데다가, 엄마아빠보다 패티의 말을 더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패티는 자기만의 아지트에 틀어박혀 사전을 보며 단어들을 갖고 놀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감옥에서 탈출한 안톤을 본다. 그리고 안톤을 자신의 아지트에 숨겨준다. 유대인 소녀와 독일 병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국 청소년 소설의 고전인 이 작품은 출간되고 난 뒤, 금서로까지 지정된 작품이다. 유대인으로 설정된 패티 부모의 성향이 당시 사회 통념상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선한 유대인, 악한 독일인, 이렇게 흑백논리가 펼쳐져 있는 상태였는데 이 작품에는 오히려 유대인이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청소년 소설답지 않은 비극적 결말이 이 작품을 금지하게까지 만든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읽히는 이유에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나 자신을 찾기라는 주제 때문일 것이다. 패티는 자신의 존재조차 무시당하는 아이다. 때문에 자기가 예쁘지 않다고, 나쁘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안톤이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패티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 자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 우리 가족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패티는 가난한 집 아이와 친구를 하고 흑인 유모를 엄마보다 더 따른다. 이미 편견을 많이 극복한 아이인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편견은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다. 악한 사람일 거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안톤을 받아들인 결과 패티는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청소년 문학의 고전을 우리나라 아이들이 읽는다면,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보통 방황을 하던 청소년이 가족의 따스한 품으로 돌아온다는 결론이 우리 사회에서 통하는 줄거리인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정반대의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옳다, 우리 가족이 틀렸다.

안톤의 은신처였던 곳에서 나는 나뭇잎 하나가

단단한 떡갈나무에서 가족관계를 끊고 떨어져나와

잔잔한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나뭇잎처럼 되고 싶다.


용감하고 똑똑한 소녀 패티 덕분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호두 겉껍질 같은 단단한 편견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다시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구명보트가 할 일이 아닐까. 난파당한 사람들을 육지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라 육지가 보이는 곳까지 인도해주는 것. 마지막 남은 몇 미터를 홀로 헤엄쳐가는 건 그들의 몫이다.

피비.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이니셜로 불린 내 이름은 이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힘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아빠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내 자유의지로 저버린 지금, 나는 스스로가 선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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