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셀수도 없이 다양한 출판사들 사이에서 세계문학 전집의 타이틀을 끼고 해외명작 번역본이 많이 출시된다. 일종의 신드롬처럼 세계고전문학 읽기가 사람들의 서재를 잔뜩 채우고 있다. 하나같이 수려한 디자인도 소장가치에 한몫 더 하고 있는건 사실일 듯 싶다. 하지만 책 겉표지 뿐이겠는가. 해외 고전문학이 지금까지 연명해 오면서 무르익은 문학적 정취의 깊은 맛은 값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감동을 줄 터이니. 그러고 보면 한국문학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사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최근 많이 출간되는 신예작가들의 작품말고. 세계'고전문학'의 흐름처럼, 한국 '고전문학'말이다.














 민음사를 비롯해 몇개의 출판사에서 한국 소설명작선을 비롯해 작가별, 시대별 문학전집을 낸 기록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 중에서도 문학과 지정사 출판사가 가장 요동없이 한국문학의 정취있는 역사를 계속 연장해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전집형태로 계속 출판을 이어나가는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출판한 다양한 형태의 한국 소설명작선 목록을 훌터보기만 하더라도 뿌듯해 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니 양해 부탁드린다. 다른거 집어 치우고, 문학과 지성사 전집들만 다뤄보겠다.














 어떤 소설이든 삶에대한 근본적인 물음표가 달려있다. 작가는 그 각자의 방식으로 그 물음을 희극적으로, 비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인물을 헤어나올 수 없는 내재적 고뇌 속에 빠뜨리거나, 자연을 통해 지나온 세월의 그릇된 역사를 짚어보기도 한다. 가족과 가족간의 사소한 일들로, 연인사이의 파르르 떨리는 잎사귀같은 감정의 울림들로도 함의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 어떤 악의와의 결탁없이 작가의 솔직함으로 관조한다. 그 관찰과 끈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들이 역자를 일궈냈고, 그 속에서 문학은 꽃피웠다. 세월이 지나서 고전문학을 본다는 것은 결코 지나온 역사로의 회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어와 문장들이 모여 울리는 두근거리는 소리. 그 수십년 전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다. 문득 역설적으로나마 심연을 울리는 글을 올리며 글을 마친다.
그 어려웠던 시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군 모든 집들의 마당들이 그런 아름다움을 가졌었다. 그 마당은 대개는 비어 있지만 언제든지 삶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어린이들이 놀든, 잔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든 그 공간은 늘 관대하게 우리 공동체의 삶을 받아들였고 그 행위가 끝나면 다시 비움이 되어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게 불확정적 비움이었고,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우리에게 전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버리고 서양의 미학을 좇으며 마당을 없앤 지금의 우린데, 서양인들은 그게 궁극적 아름다움이라고 다시 우리 선조의 마당을 찾으니, 이 황망함을 어떻게 하나.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마당 깊은 집, 그 ‘불확정적 비움’의 아름다움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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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서재가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애뜻한 공간이 서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침대 위의 포근한 이불이 꿈 속으로의 안락한 통로를 열어준다면, 서재의 책들은 또다른 세상으로의 통로를 열어주는 공간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꿈을 꾼다는 것. 혹은 이 일상을 살아가며, 차곡차곡 쌓인 일상의 기록들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모든 것은 자기만의 작고 소소한 서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재는 나를 바깥세상과 내면의 공간 사이에 작은 벽을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허물어 주기도 한다. 겪어보지 못했던 인생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게 하며 내안의 내면을 다시금 곱씹어 보게 한다. 문득 바깥 바람이 서재 창문을 스치며 들어 올때면, 유독 더 쓸쓸하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읽는 다는 행위 자체에 책이 내포하고 있는 지적인 향락을 어느정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떠들석하며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찾는 다는 그 시간. 그 자체가 주는 여유와 자기 반성의 시간들. 하지만 어떤 작가는 한권의 책을 펼치기 전과, 덮고 난 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건 시간낭비라는 말을 한적이 있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책이 지식인들만의 사유물이 아닌, 다양한 이성과 감성을 각자의 것들과 수렴해 공감하는, 그리고는 책을 덮고나서 각자의 내면으로 융화시키는 행위들. 아름답다. 하지만 말이 아름답다고 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읽는 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책을 들지 않는 한 손으론 왼쪽 허벅지의 박피를 벗겨내면서 제인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을 읽는 행위 따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진지함은 다른 곳에 있다. 흘려 읽든, 완독을 하던, 더 나아가 필사를 하든 읽는 다는 행위가 주는 의미에 내 모든 것을 우선 맡기자. 그리고선 수렴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상적인 권태를 들춰내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자기계발서 따위가 주지 못하는, 기척없이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조곤한 향기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켜켜이 쌓인다. 중요한 것들은 늘 예상하지 못할 때, 나도 모르게 드러난다.









 시대를 뒤틀었던 사상과 이념은 대부분은 '책'에서 시작했다. 모든 선언들도 몇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변화들 가장 깊은 곳에는 늘 책이 있었다. 그 모든 영향력을 내포한채, 책들은 조용히 우리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넘겨진다. 정보와 지식들이 설명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도 책의 존재 여부와 연관이 되어있다. 수없이 변천한 문명의 역사 속에서 책이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은 책의 형태로 굴착되고 말것이다. 기록으로써, 탐구로써, 세대의 문명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써, 책은 성분에 대해 끈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자체로써 번식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인생을 일구듯이. 그 일상의 기록들과 타인을 바라보는 행위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정의롭게 만들까. 그렇던 말던, 예쁘장한 수사들 다 집어 치우자. 책을 읽는 방법을 떠나,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의 지적인 향락이, 우리의 인생을 그나마 견디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만이 느끼던 부조리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것들 말이다. 책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그래서 슬픈 거짓말이다.  문득 서재에 달린 좁은 창문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바람이 쓸쓸함인지, 세상이 나에게 보내는 연민의 목소리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날이다.-ozwonsu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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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짤막한 메모한장을 남길때. 혹은 지나치듯 본 하루의 일과를 일기장에 쓸때. 어제 본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남길때. 글쓰기는 그 문체와 어휘의 선택, 문맥의 스타일들로 그 사람을 나타낸다. 마치 지문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들어내는 관점의 차이도 있을테고, 알고있는 지식의 깊이도 가늠 할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어떤형태의 글쓰기던 사람의 인격과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철학을 투영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대학입시용 논술 공부부터 강요받았던 글쓰기의 중요함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 포괄적이고 거대하다. 이미지의 산물로써 변화하고 있는 사회속에서도 언어는 결코 그 힘을 잃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 어떻게 쓸 것인가>(경향BP)는 글쓰기에 막막한 초보들에게 입문하는 방법과 그 과정을 설명하는 책이다. 이어 <글쓰기 공중부양>(해냄)과 스티븐킹이 쓴 <유혹하는 글쓰기>(김영사)는 현재 작가로 활동중인 문필가가 실제 글쓰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어려움과 문제들을 경험을 바탕으로 도와준다. 또한 우리나라 글쓰기 서적의 표본으로 불리는 <문장강화>는 글쓰기 분야에서 수십년째 베스트 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글쓰기의 표본을 배우는데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중요한 서적으로 알려져 있다. 









글쓰기의 보다 현실적인 문턱에서 겪게되는 고민들을 다루는 책들도 많이 출판되어 있다. <글고치기 전략>은 완성된 글을 제시해 불필요하고 이해에 방해가 되는 문장과 어휘를 고치는 방법을 다룬다. 끊임 없이 고치고 다시 고치는 방법이 글쓰기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또한 글을 쓰기전에 '어떻게 쓸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도서들도 있다. 다루고자 하는 논제에서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키워드를 얻어서 어떤 맥락으로 글을 작성할 것 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 









다양한 스타일을 제시하는 글쓰기 방법을 논하는 책들도 적지 않다. 특히 산업활동에서 광고 마케팅등의 수단으로써 글쓰기는 더욱이 사업상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보다 중요하게 각광받고 있다. 대중들에게 보다 설득력있게 상품과 이미지들 인식시키는 글쓰기 방법들은 국내 대기업에서 권장도서로 분류되어 사원들에게 요구되는 과제로 주어지기도 한다. 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상품이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각인시키는 수단으로써의 글쓰기는 기업의 이익창출에도 큰 몫을 더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또한 <논술 글쓰기>, <학술적 글쓰기>, <사회적 글쓰기>, <여성적 글쓰기>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요에 의한 관점을 가지고 테마에 맞게 글쓰는 방법들에 대한 도서들이있다. 


 수없이 많은 글쓰기 서적들이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하나로 수렴되는 부분이 있다. 개성적인 글쓰기. 전해 내려오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구상하고, 문장을 창조해 내는 개성적인 글쓰기을 강조한다. 개인의 성격과 관점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결국 문장이 그 사람을 포괄하는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가지는 스타일이 각광받는 요즘 세대에서, 보다 솔직하게. 하지만 결코 진부하지 않은 개성적 글쓰기가 요구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ozwonsu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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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판

Ari Ari the Korean Cinema, 2011감독 허철주연 정지영 윤진서







 한국영화, 문제 참 많다. 80년대 지독한 정치검열에의해서 이념에 부딛쳐 상영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영상예술은 국가의 정치적 이념을 전파하는 수단으로써 이용되고 그에 반하는 영화는 상영은 커녕, 만든 감독은 남산 지하실 어딘가로 끌려 가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오래전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87년 이후, 영화 검열자체가 해제되기 전까지 채 25년 전 이야기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라 여겨지는 60년대에서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독재정치는 이념의 문제로 영화를 짖밟았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자본의 이름으로 짖밟히고 있다. 


 대기업의 자회사 그룹들이 영화판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말그대로 '수익이 되는 상품'으로 영화는 상당부분 변질되었다. 1999년, 멀티플렉스 시대의 개막과 동시에 충무로의 영화제작 시스템은 대기업의 수익창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당연한 이치대로 흘러갔다. 헐리우드의 장르영화가 관객들의 선호를 받으면서 우리나라 영화제작 스타일도 대중들의 입맛에 결기되고 말았다. 대중들에 입맛에 의해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것이다. 관객들이 감당하기 힘든 영상과 스토리는, 투자자 입장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자본의 피해로 다가왔다. 때문에 대중의 입맛에 맞는 영화들이 제작되고, 감독의 독창성과 예술성은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는 추세가 이어졌다. 물론 그 사이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들도 없었던건 아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영화판에서 그런 영화들이 드물다는 것. 영화가 영상예술로써의 근본적인 이상에 접근은 커녕 관심조차 없는 형태로 보여지고 있는 현실. 거기서 부터 문제였다. 21세기 한국영화는 지난 정치검열을 넘어, 또다른 형태의 자본검열을 받기 시작했다.


 <영화판>은 허철감독이 연출하고,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 배우 윤진서가 인터뷰어로써 출연해 영화를 이끌어 간다. 아니, 사실 이끌어 가는 모습이 아니다. 인터뷰어로써 질문을 던지다가 어느새 편집상 공백 속에서 인터뷰어가 직접 대답하는 형식으로 결론을 돌출하는 모습마저 비춰진다. 이미 인터뷰어로써의 역할과 출연자의 역할 사이의 벽이 허물어 지면서, '한국영화의 거장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는 본래의 취지마저 모호해 졌다. 결코 '융화'의 뜻이 될 수 없는 그 벽이 무너지는 순간 영화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흔들린다. 거장 감독들과 배우들을 옆에 두고, 하고싶은 이야기를 해버리는 '원맨쇼'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은 정지영감독의 잘못도, 배우 윤진서의 잘못도 아니다. 편집의 문제라고 믿고싶다. <영화판>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영화판에서 일했던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각 주제에 맞는 쿼터로 나눠 나열한다. 앞으로 제시 될 인터뷰 내용들을 요약한 주제의 타이틀을 드러내고, 그것과 관련된 그들의 의견들을 비춘다. 하지만 허철감독은 그 마저도 혼돈한다. 각기 다른 담론의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서 얻어낼 수 있는 비슷한 어휘와 반응들을 문맥상 어울린다 싶으면 꽃아 심어놓은 느낌이다. 배우들과 또 다른배우들의 영상이 하나의 주제로 교차되어 나타나면서, 그 속의 통일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그모습은 꽃병에 꼿힌 정신없는 조화처럼 느껴진다. 메인 타이틀을 상실한채 배우들이 내뱉는 문제의식들은 엉성한 편집에 의해 두서없이 던지는 잡소리로 변질 되어 버리는 것이다. 꽃병에 꽃이 만발했다고, 꽃이라고, 다 예쁜건 아니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훌륭한 배우와 감독, 제작사, 영화평론가, 영화학 대학교수들을 카메라 앉혀놓고 이정도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럽다. 그들의 술자리와 인터뷰 자리에서 결코 쓸데없는 이야기가 오고갔다는게 아니다. 잠깐씩 튀어나오는 꽤나 명진한 문제의식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진지한 문제의식이 쏘옥 하고 튀어나오는 것. 한가지로 수렴되는 문제의 진지한 담론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진 모래알 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널부러져 있다. 영화판을 이야기 하는 '난장판'으로 변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50년대부터의 한국영화 역사를 집어 보면서, 80년대의 영화검열이 영화사에 끼친 악영향. 그로 하여금 놓쳐버린 중요한 감독들. 그리고 자본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검열을 받는 오늘날의 세태들. 정치에 의해, 자본에 의해 타압받는 영화판을 후반부에 다룬다. 한때 영화 전성기 때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으나 '노력해도 안되더라'는 정지영 감독의 실질적 고민을 등에 얹고 영화 제작의 높은 벽을 이야기 한다. 이 벽은 왜 여기에 놓여있는 것인가. 출연자들은 자본에 따른 영화판의 한계를 이야기 하지만 감독은 그 이야기들을 하나의 깔때기로 모아 애써 수렴하려고 하는 연출이 역력히 보인다. 몇개의 단어와 문장들이 서로 결탁해 하나의 입으로 모아지길 의도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가 나오려 하면 잘려지는 편집을 보면서, 감독 한명의 이야기라도 좀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영상으로 보여지는 행위들에 적당한 당위를 부여하고, 욕설과 섞인 다른 의견들에 대해서 군화발 같은 편집으로 짖눌러 버린다. 열린 의견과 현실적 대안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 부족이 드러낸 처참한 결말이다.


 대한민국 '영화판'은 문제가 많다. 사회적 특수성과 급변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수도없이 휩쓸린 고난의 상처들이 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을 다시금 화자하고, 극복의 의지로 똘똘 뭉쳐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할 수 있다. 너무도 훌륭한 취지이며, 영화는 그정도의, 그 이상의 수단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로써 최소한의 만듦새도 가지지 못한 영화는 그 자체부터가 문제의식을 가지게 만든다. (영화의 엔딩으로, 정지영감독이 '부러진 화살' 영화 제작을 시작하기 전 고사를 지내는 모습이 나온다. 그 어떤 공론과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없이 이 장명은 판타지처럼 등장한다.) 이 영화는 <영화판>이 당장에 직면한 현실적 문제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그 문제를 들춰내는 방법도 부족했다.-ozwonsu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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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치콕 얘기를 좀 해야겠다. 반세기가 훌쩍 지나서도 끈임없이 화자되는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가치도 불필요 하게 느껴진다. 서스펜스의 거장. 스릴러의 거장. 서스펜스랑 스릴러가 뭔차이가 있던, 고추장과 된장의 차이건. 순수하게 히치콕의 영화에 대한. 아니 히치콕과 영화에 대한 잡념을 적어보려 한다. 


히치콕 영화단상 1

 <싸이코, Psycho, 1960>



PSYCHO

Alfred Hitchcock's Psycho , Psycho, 1960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배우 안소니퍼킨스 베라마일즈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에 대한 연민의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고, 영화의 내용과 사건에 대한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다. 혹은 영화에 관련한 사람이라면 영화 감독의 테크닉과 표현법에 느낄 수도 있겠고. 여하튼 히치콕은 영화적기법으로 '스릴러'를 다뤄내는 최고의 감독이다. 그는 그 자체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감독이다.


 대부분이 그랬을 거라 믿는다. 나도 흑백영상이 이루고 있는 욕실에서, 입이 찢어질 듯 소리지르는 전라의 여자의 모습이 연상되는 '싸이코'를 가장 먼저 봤다. 영화초반부터 후반까지,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어두운 분위기와 음습한 기운들이 이 영화를 하나의 스릴러 작품으로 연상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수도 없이 인용되고 거론되고 심지어는 연구되었을 장면이겠지만, 욕조신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커튼을 치고 개인적인 공간에서, 게다가 입고있는 옷 하나 없는 인물의 현상황이 가지는 공간적인 공포감. 마치 무서워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올렸을때 찬바람이 쌩하고 지나가는 허전한 발처럼 심리적인 여백이 남겨주는 공포 속에서, 칼을 쉴새없이 여자의 신체 부위를 여기저기 난도질한다. 컷들은 여자의 입, 눈, 코, 팔을 지나 배수구로 흘러내려가는 핏물을 비치면서 순간적으로 인물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형태들을 캐치하듯이 빠르게 나열한다. 


 히치콕의 영화는 흔히 공포물에서 보이는 사건과 사건의 더미 속에서 가해지는 충격의 이미지들과는 많이 다른점을 볼 수 있다. 사건이 발발하는 상황설명과 이유를 알 수 없고 심지어는 그 범인조차 알 수 없다. 다양한 사건들에 의해 설명되고 분명한 행위가 아닌, 근본적인 공허함 속에서 가해지는 공포인 것이다. 거기에 치밀하게 계산 된 카메라 구성과 소름끼칠 정도로 냉혹한 사운드 트랙이 그 공포감을 더한다. 히치콕은 설명될 수 없는 대상으로 부터의 근본적인 공포감을 선호했다. 


 히치콕이 후대 영화계에 남긴 유산은 분명하게 일컬어 진다.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특유의 카메라 구도. 스릴러 영화로써 배경음악이 가지는 의미. 사건이 꼬이면서 관객들에게 사건의 여지를 숨기거나, 극단의 공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의 설정등. 하지만 이런 테크니컬한 부분들이 히치콕의 손에 의해 나올 수 있기까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겠다. 난 한명의 감독은 한명의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히치콕이 가진 대중성과 더불어 그가 동시에,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던 '작품성'에 그의 철학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느끼는 공포의 본질적인 근원과 편중된 감정이 가지는 왜곡의 공포들에 대한 연구와 분석. 그것들에 대한 끈임없는 노력들이 후대 스릴러 장르에서 테크닉컬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되고 차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ozwonsuv

<다음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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