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 p12 - 13
책과 연인의 공통점은 의외로 많다.
때론 베개가 되기도 한다.
끝까지 읽어도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외출할 때마다 데리고 다닐 수는 없다, 짐이 되기 때문에.
그러나 기차 여행을 할 때는 동반하고 싶다.
침실까지 따리올 때도 있다.
겉모양이나 표지가 멋있다고 내용물이 충실한 것은 아니다.
크고 두껍다고 많은 것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때때로 쓸데없이 비싼 것도 있다.
오래 묵히면 그것에서 추억의 냄새가 난다.
이별의 전조와 실연의 정황_ p 28
사랑이, 사랑이 지닌 모든 통속성, 상투성, 진부함, 퇴행성,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나면 이미 사랑이 아닐 것이다.
혹은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쏟은 에너지의 엔트로피는
그 자체로 사랑의 방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차라리 통속성과 상투성을 껴안고 진부하고 퇴행적으로
상대에게 투항하는 것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이별의 전조와 실연의 정황_ p 51
누구라서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 것인가.
누구나 초자아의 검열을 받고 있다.
자아는 언제나 초자아와 이드(id)의 중개에 실패한다.
사랑을 한답시고 연인의 욕망을 욕망할 뿐, 자신의 욕망을 돌보지 않는다.
상대의 욕망을 욕망할 때, 실상 그 욕망은 어느 누구의 욕망도 아닌 것(nothing),
그래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배우들일 뿐이다.
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그것을, 혹시 사랑이라고, 배
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정과 슬픔의 정황_ p 95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고백했다고 가정해보면, 이 문장을 내뱉는 순간,
이 말을 한 화자는 '너'의 타자성을 지워버리게 된다.
"나는 너를 사랑해." 에는 '나의 사랑을 받아줘.' 라는 명령뿐만 아니라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해.' 라는 명령도 들어 있다.
상대를 자아화하려는, 즉 동일자로 만들려는 욕망이 내재된 것이다.
[...]
서 우리는 간혹,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고백을 들을 때 순
간 불편해지거나 두려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고백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의 타자성이 나의 말로 인해 지워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대적인 타자성이 없는 '너'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다.
사랑을 말해본다_ p 202
좋은 이별은, 좋은 사랑을 위한 희망이 된다.
사랑했다면, 그것이 이별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존중은 계속되어야 한다.
억지로, 헤어진 연인을 떠나보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찰나의, 그/녀와 찬란했던 순간이 섬광처럼 터졌다 지더라도,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기억은 그렇게 몸속 어디에서 폭죽이 터지고, 그것이 이내 뜨거운 눈물이 되더라도,
조금만 덜 안타까워하고, 덜 슬퍼하면 된다.
사랑을 말해본다_ p 242
부부는 서로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결국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관계일 수도 있다.
대체로 부부들은 결혼 초기에 형성된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라 상대방을 이해한다.
결혼한 첫 해에는 부부들이 결혼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읽으려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잘 이해한다는 '과도한 자심감'을 갖게 돼
서로의 말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관찰하려는 동기가 떨어지고 노력을 게을리 하게 된다.
그러니까 부부란,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고착되는 관계가 아니라,
결혼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잘 만들어가야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부부란, 서로 편하기 때문에, 점차 편해지지 않는 관계가 되는 사이이기도 하다.
이별 여행을 마치며_ p 271
이 책은 소요하지만 끝내 이별과의 교신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이별을 긍정하는, 이별한 자들을 긍정하는 안간힘이다.
이별한 자들을 긍정한다는 것은,
이별한 자들이 사랑으로 선회할 것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별에 대한 책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책이다.
이별은, 사랑으로 가는 가장 먼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