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자고 첫날.

상하이 지도를 쫙 펼쳐 놓고 가고 싶은 곳을 표시했을때 가장 밀집 되어 있는 곳이 남쪽의 프랑스 조계지 였다.

상하이는 크게 남서 쪽 프랑스 조계지, 북쪽 일본 조계지, 동쪽 영국 조계지, 그 사이 각국 공동조계지, 그외로 나뉘어 진다.

우리의 답사 일정도 그렇게 짜였다. 애초에는. 하지만 오후가 되면 돌발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길바닥에 시간을 쏟아 붇고, 결국 다 보지 못하고 다시 그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가장 일정을 잘 지킨 날이 이 날과 마지막 날이 아닐까.

일찌감치 호텔 식을 먹고(호텔 식은 숙박비에 포함된 것으로 20위안 짜리인데 볶음밥도 나오고, 죽도 괞찮고, 뭐 그런데로 먹을 만 했다. 하지만 이것도 7일 연짱 똑 같은 메뉴로 먹기엔 힘겨웠다. 메뉴의 변화가 전혀 없고 우리가 결국 먹는 것도 항상 볶음밥에 죽이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자 다시 인민광장으로 갔다.


7일동안 매일 먹은 볶음밥과 죽

우리가 머문 숙소는 난징 동루에 자리 잡고 있어 인민광장과 매우 가까웠다.

인민광장은 지하철이 4개나 지나가는 중심지라 교통은 편리한데 인간들이 무지 많았다.

서울의 지옥철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리면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았다.


미어터지는 인파들

지하철은 거의 1분 간격으로 왔다. 그리곤 매번 수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집어 삼키고 사라졌다.

대중교통 수단 이용하면서 느낀 중국인에 대한 판단(!)

첫째, 중국사람들 줄 잘 안선다. 우리가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웬 사람들이 은근슬쩍 끼어들어 있다. 소위 새치기. 항상 조심하지만 엉겁결에 새치기 당한다.

둘째, 교통 질서도 무지 안지킨다. 파란불에 건너는데 한창 파란불인데 멀쩡히 건너는 우리앞으로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어의없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빨간불에 막 지나간다. 우리도 마지막날엔 8차선을 무단횡단했다.

세째, 중국 사람들 아니 상하이 사람들의 특징. 진짜 걷는것 싫어하여 절대 계단 이용 안한다. 미어터져도 에스칼레이터를 탄다. 그래서 에스칼레이터 쪽의 승강장은 더 뽁짝 거린다.

 쉬자후이 성당에 도착했다. 여기서 부터 중심지 쪽으로 훑으면서 동선을 잡았다.


쉬자후이 성당

지하철에서 내려 묻고 걸어 제법 쉽게 찾아 간 곳.

그런데 문이 꽁꽁 잠겨 있다. 분위기가 웬지 안좋았다.

안내문을 보니 오후 1시부터 내부를 개방한단다. 현재시간 오전10시쯤. 이일을어쩐다.

문옆에 수위실 비슷한 곳이 있어 사정을 했다.

여권을 달래서 보여줬더니 별로 보는 것 같지도 않고 볼줄도 모르는 듯.

어쨋든 문을 열어준다. 특별히 외국인의 방문을 가상히 여긴 듯.

단 사진을 찍지 말랜다. 안찍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들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감사.

1896년 건립된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란다.

이런 뾰족 탑, 뾰족 지붕을 고딕 양식이라 배웠지.

이 지역이 서광계라는 사람의 후손들이 정착해서 살아서 서가장(쉬자후이)이라는 지명을 가졌다.

서광계는 중국의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가지는데 마테오리치의 영향으로 개종했고, 이후 그의 천주실의 집필과 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란다. 이곳에 이런 성당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중국 공산화 이후 반 종교정책에도 꿋꿋하던 이 성당도 문화대혁명때 홍위병에게 파괴되어 첨탑이 날라갔단다.

지금 것은  1982년 중국 정부가 복원. 지금의 성당 체계도 교황청과 무관한 공산당이 임명하는 주교가 관장하는 애국교회란다.

난 못 봤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의 무대였단다.

내부로 들어가니 어느 성당, 교회, 절과 마찬가지로 장엄하고 엄숙하고 정갈한 것이 모든 종교는 그 계통이나 체계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 같더라.

스텐드 글래스며 신기한 그림들이 있더만 사진 안찍겠다는 약속때문에 아쉬워 하다 남자 2명이 들어와 사진찍길래 우리도 살짝 살짝 셔터를 눌렀다.


예수의 생애를 그린 그림과 한자 설명글


서광계와 마테오 리치를 그림


성당 내부 모습


문화 혁명때 잘려나간 첨탑

스텐드 글래스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상징하는 문양을 보면 마치 상해 박물관 청동기의 문양과도 느낌이 비슷했고, 또 예수의 생애를 4자한자로 압축해 놓은 것 해석(?)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맡겨놓은 여권을 찾아 들고 송경영 고가를 찾아 갔다.

지도상으로 한 두 블럭쯤으로 나와 있어 걸었다.

지도의 거리명과 실제 길의 거리명을 맞춰가며 걸었다.

한 시간정도. 뭐 아직은 초장이니 그 정도 걷는 것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이것 저것 거리 구경도 재미있고. 하지만 이런 보행들이 골병의 시작인 줄 이땐 몰랐다.


지나다 들른 화랑
 

이 주변도 제법 옛 건물들이 많았다. 생긴게 심상치 않아 들어갔더니 화랑이었다. 내친김에 그림들도 구경하고.

 
소위 식민지형 테라스 건물

서양 국가들이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배하면서 더위를 이기기 위해 만든 테라스 건물들. 근데 이런 건물들이 갑자기 만국 공동 식민지역에 등장한다. 별로 덥지도, 테라스도 필요없는 지역들에.


길거리 공중 화장실 - 상급이다.


상하이 주거 특징 룽탕 모습


고층 아파트

전통적 영세 룽탕이나 고층 아파트나 공통적인 것은 상하이 집들은 빨래를 밖으로 너는 것이다. 빨래대를 밖으로 내어 놓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듯. 온통 휘날리는 이불, 빨래들. 떨어지지는 않는지.

걷고 또 걸어 겨우 송경령 고가에 도착했다.


송경령 고가 입구

입구가 권위적이고 들어서면 공안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으로 이미 이 고가의 무게감을 느낄수 있다.



송경령 동상과 기념관

19세기 말 격동기의 중국을 살았던 송씨 집안의 세딸 중 둘째. 송경령.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한 첫째 송애령, 2천5백년 황제 국가를 무너트리고 공화주의 국가를 건설한  혁명가 손문과 결혼한 둘째 송경령, 손문의 뒤를 이어 국민당을 이끌고 급기야 대만으로 도망한 장제스와 결혼한 세째 송미령.

첫째는 돈을 사랑했고, 세째는 권력을 사랑했다면 둘째는 조국을 사랑했다라는 말도 있다.

대부호의 딸로 태어나 미국 유학까지 한 젊고 매력적인 신여성 송경령은 26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아버지 친구 였던 손문과 결혼했다. 11년간의 결혼 생활 뿐이었지만 둘은 지극히 사랑했고, 정치적인 동지였던 것 같다.

손문이 죽고 난 후 송경령은 손문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혁명가로서 당당히 홀로 걸어갔다.

국민당 대신 중국 공산당을 선택하고, 이후 중국의 세찬 역사에 줄곧 국모로 존재했다.

집안 곳곳에 사회주의 국가 원수들과의 사진과 선물들이 그득하다.

모택동의 각별한 관심도 사진이나 물건들에서 느껴진다.

찍은 줄 알았는데 없는 사진. 식당에 걸려 있던 춘향전 자수는 김일성이 준 선물이란다.

송경영 고가의 뒷편

1981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이 저택에서 오히려 난 검소함이 느껴졌다.

그 어떤 사심없이 오직 자기 조국을 위해 한몸 바친 숭고한 여성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성황후에게 '조선의 국모'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국모'라는 이름은 아무데나 붙이는게 아닌것 같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2시간 남짓 끊임없이 중국 젊은이들이 가이드와 함께 다녀갔다. 그녀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여전한 것같다.

다시 손중산 고거로 가야 했다.

좀전에 너무 걸어서 이번엔 버스를 꼭 타려 맘먹었다.

이래저래 버스를 타고 걷고 해서 도착했다.


손중산 고거 입구
신해혁명의 주역인 쑨원. 그 호가 중산이다. 손문이나 나중에 노신이나 지식인이요 의학도 였으나 조국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대만의 중화민국정부와 중국 중화인민정부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인물.

이곳은 1918년에서 24년까지 살던 곳으로 손문을 지지하던 캐나다 출신 화교가 기증한 3층 양옥집이다.


손중산 기념관과 고거

기념관옆에 그의 침실, 주방, 사랑방이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입장권을 회수해갔다. 기념으로 아무리 달래도 안주더군.

사진도 내부는 못찍게 하는 통에 껍데기 사진만 있다.

공안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릴 감시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보통 cctv를 설치하는데 여긴 인력이 싸니깐 그냥 사람을 고용해서 관리 하나 보다.

그것도 괞찮네. 한번씩 묻기도 하고.

한참 구경하다 이상한 것 발견. 아니 이럴수가.

송경령 고가와 달리 손문의 집에서는 책이 참 많았다. 그것도 역사서가.

역시 지식인이라 사서를 많이 읽었나 보다. 했지.

곳곳에 책장과 책들. 그 책들을 자세히 보니 진짜 책이 아니고 꼭 책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그런데 그 사진이 얼핏 보면 책을 넣은 듯 했다.

우리나 되니까 알아내지 원.


손중산 동상

잠시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다시 주은래 고거를 찾아 떠났다.


산뜻한 옛 집들


길거리 청소 차량- 눈올땐 눈도 치우더만


깨끗하고 반듯한 거리 프랑스 조계지

한 300m쯤 갔나 곧 찾을 수 있었다.


주공관

일본 패망 직후 1946년 중국 공산당 상하이 지부가 있던 곳으로 겉으로 공존을 표방했지만 속으로 갈등을 빚던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당시 국민당의 점령지 였던 상하이에서 두 세력모두에게 존경받던 주은래의 이름을 빌어 공산당은 활동할수 밖에 없었다.

침실에는 당시 공산당원들이 사용하던 도미토리 침대가 놓여있었고, 앞서 두 고거에 비해 매우 규모도 작고, 시설도 열악한 것이 역력하였다.

이곳을 보니 조국의 해방에 도움이 될까 이웃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에 몸을 담고 탄압을 피해 활동했을 우리 조상들이 생각이 나 코끝이 시큰 했다.


주은래 동상



중국 공산당 상하이 지부

좀 약하게 보고 다시 근처에 있다는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 나섰다.

이번엔 걸었다. 길 안내가 부실하여 버스를 이용하기 힘들었고, 택시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한 30분쯤 걷고 걸어 저 멀리 한국어 간판이 보였다.

유난히 낡은 거리느낌. 좀전의 깨끗한 프랑스 조계지와 사뭇 다른 뒷골목 풍경. 이곳에 임정이 거처했구나.


말리는 물고기류


말리는 육류들


한국어 간판들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관리처


임시정부가 세들어 살던 마장로 36 룽탕


임정 청사 복원 기념비

우리 교과서에 나왔던 그곳은 허물어 지고, 이곳의 임정청사와 충칭, 가흥지역에 임정이 남아있단다. 유난히 낡은 거리라 재개발 대상으로 허물어 질 지경이었으나 본국의 여론이 들끓어 우리 정부가 겨우 보존하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별 볼거리는 없고, 사진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어 가이드가 있었으나 참으로 빈약한 설명으로 전혀 도움이 되질 못하고, 사람들은 바글바글거렸다.

내부는 대부분 재현된 것일텐데도 절대 사진못찍게 했다.

이곳에 덧신 나르는 일을 하는 한 아줌마 - 한국인에게 끊임없이 사진찍지 말라고 신경질을 부리는 사람- 한국인을 무지 싫어 할 것 같은, 한국인도 이 아줌마를 무지 싫어 할것 같은 사람이 있더군.

난 뭐 사진 안찍었지만 주변에 망 봐주면서 몇 컷씩 숨바꼭질 하며 찍기도.


하루 800여명 한국인이 북적이는 곳

단체로 직장에서 온 사람들. 거의 한국인들만 오는 유적지.

비록 임정이 이곳에서 겨우 몸이나 보전하고, 실제 독립운동을 지도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뜻이 조국의 독립에 있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또 일제의 탄압을 받아 가며(바로 앞에 경찰서가 있었다 한다) 뜻을 도모하려 했다는 곳에 직접 와 보니 감정이 북받치기도 하여 눈물이 남(난 원래 감정적이니까)

다시 어두워 지는 거리속으로 중국 공산당 일대회지로 간다.

거의 문 닫을 시간이라 서둘렀다.

임정 건물 찾는데는 무척 애를 먹었다. 간판이 별로 없어서.

근데 자기들에게 중요하다는 일대회지는 정말 대문짝 만하게 곳곳에 간판이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닫을 시간이라 칼같은 공안들이 출입을 막았다.

그저 밖에서 스쿠먼 구조라는 철문 형식의 건물만 봤다.

중국 공산당이 1921년 7월 23일 제 1차 전당대회를 열었던 곳으로 중국 공산당에게 불멸의 성지와 같단다.

당시 중국 전역의 공산당원이 57명. 그 가운데 각 지역 대표가 13명이 참가했다. 당시 20세 였던 모택동도 호남성 대표로 여기에 참여.

거의 모의수준인 이 전당대회도 프랑스 경찰의 개입으로 저장 성 지아싱 호수에 배 띄우고 마지막 회의를 했다나.

속을 안들여다 보니 기억도 약하다.


중국 일대회지

결국 신천지까지 왔다.  최근 놀기 좋은 곳으로 이름난 곳 답게 기념품들도 럭셔리 하고, 음식점 쇼핑센터가 완벽했다.

오늘 하루 너무 열심히 돌아다닌다고 밥도 못먹고, 물도 한모금 못먹고, 잠시 잠시 다리쉼도 못했으므로 좋은 음식점에 들러 밥먹기로 했다.


이 일대의 가장 놀기 좋은 곳 신천지


그래서 찾은 식당, '정태풍' 깔끔한 인테리어, 수많은 종업원들이 대기중(중국의 일반적 무시분위기와 사뭇 다름). 배고픈 김에 둘이서 3가지를 시켰다.

맛도 좋았다. 좋을 수 밖에. 이날 먹은 이 음식이 8일동안 있으면서 먹었던 그 어떤 것 보다 맛있고, 비싼 음식이었다. 초장에 이런 걸 먹었으므로 난 중국 음식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괞찮군. 이렇게 뿌듯할 수가, 잘 다니고, 많이 보고, 밥도 만족스럽고.


중국 물만두


볶음밥


중국 국수

하지만 점점 몸이 지쳐가는 듯.

밥먹고 바로 숙소로 들지 않았다.

밤이 되고 나서 숙소 주변의 상가 구경, 장보기, 커피점에서 이것 저것 .

이후의 일정들로 밤 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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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1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강행군은 강행군이군... ^^ 갑자기 상해도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만...우리나라 고가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 고가의 느낌이 전혀 안나는게 참 다르네. 예전에 북경갔을때도 보니까 진짜 교통신호 안지키더만 그건 여전한가보다. ㅎㅎ
지금 연수받고 있는 것 숙제한다고 미치겠다. 내일까지 제출인데... 이제 겨우 반했는데...ㅠ.ㅠ

아사히 2008-02-12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수가 연수만 받으면 되지 숙제는 뭔 숙제.
참 연수도 함부로 들을게 못되는군요.
상해도 좋긴 좋아요.
적당히 놀기도, 먹기도, 쉬기도 한다면.
오히려 쾌적하면서도 볼거리 쏠쏠한 곳이랄까.ㅋㅋ
너무 하루 일과가 많아서 여행기 하루치 쓰는데 시간 너무 많이 걸린다.
어제 귀신 수업했는데 쫌 무서버서 남편 잘때 얼른 마무리 하고 따라 잤어요.

산지니 2008-02-13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하고 사진보니 정말 상해 가보고 싶어지네~~
책에서 보던 프랑스 조계지가 저렇구만^^
사람들 꼬드겨서 상해쪽으로 한번 가자고 해야겠다 ㅎㅎ
근데 한시간씩 걸어가면서 찾아 다니는 건 좀 글코 ㅠㅠ
우린 담에 슬슬 반쯤 놀아가며 가는 걸로다 한번...

아사히 2008-02-1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 같이 갔으면 얼매나 좋았을꼬.
상해는 3박 4일 짜리로도 충분히 볼수 있고, 가까우니 가볍게 갔다올수 있는 곳이니깐 언니네는 아이들도 크고 가족여행도 좋겠어요.
부산은 많지 않지만 인천출발은 금요일 오후에 가서 월 저녁이나 화 저녁으로 오는 비행기가 많더라구요.

점순이 2008-03-0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나만 바쁜 건 아니었나보다~^^ 남일(?)인가로 옮겼다고 민지현이라는 학생이 알려주던데~ 많이 바쁘지? 애들이 수진샘이랑 니가 학교 옮겨서 많이많이 슬퍼했다는 행복할 후문을 전한다~^^

아사히 2008-03-11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는 좀 어때요. 새 생활이 바쁘지만 느낌은 또 다를 것 같아요.
 

갈때에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비행기에 올랐건만 돌아 올때는 만신창이가 되어 거의 폐인으로 돌아온지라 여행기를 쓰려니 기분이 묘하다.

보통은 즐거운 기운에 여행기에도 그때의 행복감이 묻어나건만 나의 상하이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었다고나 할까..

7박 8일 장기간(?)여행중에 3일째에 걸린 감기로 기침이 거의 폐렴이 의심스러웠고 고열에 코와 입으로 나오는 피와 가래등은 모든 음식물 맛을 쓰게 만들었다.

돌아오자 마자 들어누워 나 죽는다하고 병원가서(난 진짜 감기같은 거 안걸리는 사람 병원은 애낳을 때외엔 안간다) 주사맞고 약타고 급기야 동생 불러서 링겔 까지 맞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헤롱거렸다.

일주일쯤 지난 지금에서야 눈에 총기가 좀 들어오는 듯 ....

의사 말에 큰 병은 아니고 너무 무리해서 그러니 푹 쉬란다. 그래 너무 무리했다. 너무너무

병이 깊어 지기 전까지 우리는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걸어다녔다. 그렇게 싼 택시요금에도 우린 반드시 걷거나 버스를 갈아 타고 다녔다. (너무 힘들땐 내돈내고 택시 탔다.)

상하이의 이상기온도 겹쳤다.

갑자기 눈이 오더니 4일 연장 눈이 내렸다. 어찌 춥던지. 지금도 뼈속까지 한기가 느껴진다.

가뜩이나 느끼한 중국음식이 입이 쓰고 입안이 전부 헐어 아무것도 넘기질 못하니 몸에 무리가 갈밖에 ....

애초에 8일동안 공동경비로 쓰기로 했던 각자 2000위안이 반도 안썼으니 우리 여행이 정말 빈티나는 여행일밖에...

같이 갔던 동료는 워낙 이런 여행에 단련이 된듯 끼때마다 밥먹겠다는 내가 무척 답답해 보였나보다. 담에는 패키지로 다녀란다.

동료는 아침에 호텔에서 식사 가득하면 4시가 넘도록 안먹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푸동공항

아시아나를 타고 도착한 상하이 푸동공항은 진짜 컸다.

이때부터 중국은 뭐든 다 크다. 큰 것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나 했는데 알고 보니 워낙 사람이 많은 탓에 항상 크게 뭐든 크게 만들 수 밖에 없더라.

비행기 타는 곳, 내리는 곳, 환전하는 곳, 로밍하는 곳 등이 다닥다닥 붙은 김해 공항은 진짜 구멍가게 수준이다.

부산과 1시간의 시차를 가진 상하이에 11경에 도착해서 시내로 가기 위해 자기 부상열차를 타봤다.


자기부상열차

상하이 시내까지 가려면 룽양루 역에서 갈아 타야 하지만 항공권 갖고 있으면 50위안짜리를 40위안 해준다해서 타봤다.(올때도 타게 된다.)

시속 450km까지 속도를 내는데 8분이면 룽양루 역에 도착한다.

계속 속도를 올리다가 최고 속도에서 다시 속도를 내린다. 끝이다. 약간 허무하다.

2위안하는 버스비에 비해 비싼 편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는 않았다.

룽양루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갈아타고 난징 동루역까지 갔다.

중국 지하철 무지 시끄럽다. 사람들이 외치는 수준이다. 거기다 칸사이 문도 없다.


중국 지하철 2호선

우리의 숙소인 동아반점(중국은 호텔을 반점이라한다.)을 찾아 지도를 참고로 계속갔다.

광장쪽에 경찰서와 인포메이션센터가 있어 들어갔더니 주머니에 손찌르고 정말 불친철하게 대꾸했다. (중국인들이 원래 불친절하다니 참고 익숙해지기로 했다)

겨우 동아반점을 찾고 체크인을 하는데 호텔 직원도 우릴 거의 무시한다.

적응안되었다. 100위안을 계약금으로 내놓으라해서 주었다. 체크아웃할때 받아간단다.

중국 호텔은 대부분 그렇단다.

이럭저럭 짐을 풀었다.

잘 찾아왔다는 안도감과 과이 별 2개짜리 호텔치고 넓고 깨끗하여 만족스러웠다.

일단 오후 일정을 상해 박물관으로 잡고 그곳으로 갔다.

점심은 대충 먹기로 해서 동아반점 주변에 맥도날드로 갔다. 한국에서도 잘 안가는 햄버거가게를 중국에서 첫식사로 먹었다.

햄버거와 음료를 1,2층에서 따로 팔았다.


중국 맥도날드

2시쯤 지나서 들어간 상하이 박물관


높은 빌딩에 둘러싸인 박물관

명성대로 거대한 박물관이었다. 고대 왕의 상징인 솥을 상징한단다. 천원지방을 담고 있기도 하고.

한국 설명기가 40위안이었다. 입장료가 20위안인데.

결정적으로 설명되는 유물이 별로 없었다.

일단 가장 하이라이트인 청동관을 들어갔다.

부산시립 박물관에 초대되어 온적이 있는 유물이었다. 그때 충격 받았는데 역시나 대단했다.

기껏해야 청동기라면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정도로 떠올리는데 각종 제기며 그 문양들이 가이 기원전 2-3000년전의 것이라기에 놀라울 따름이다.

한번 보면 꼼꼼하게 보는 동료는 거의 모든 유물을 사진 찍었다.

난 도록을 살 생각으로 참았다. 난 메모리가 1기가밖에 안되므로...




청동기에 새겨진 문양들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

이야기를 담은 이런 그림들은 해석하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2층의 자수관은 살짝 돈다고 했는데 중국 사람들 성격이상한 사람 많았다.
자주 잠자리 날개

이런 것 자수 놓고 있다가는 정신분열 일으키겠다 싶을 것들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4층짜리 건물에서 2층에 들어가자 마자 5시 10분전 이라고 빨리 나가란다.

칼이다. 잘못하면 박물관에 갖힐 것 같은 분위기다.

아쉽지만 나왔다. (6일째에 다시 와서 다 봤다. 결국 박물관에서 하루종일 보낸 격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결국 지리도 익힐겸해서 와이탄으로 갔다.

상하이의 고건물들이 집중적으로 있다는 황푸강변. 걸어갔다. 그것도 꽤 되는 거리인데.

가다보니 삼성의 신세계성이 보인다. 완전 나이트 분위기다. 악단이 '반달'을 연주하고 아저씨 아줌마들이 쌍쌍이 춤을 춘다. 매일밤 여기서는 이런 모습이 펼쳐졌다.

아침에는 맞은편 건물에서 춤을 춘다.


쌍쌍파티

배가 고파 난징동루에서 밥집을 찾았다. (상하이의 길이름은 난징, 옌안, 베이징등등 중국의 중요 도시명을 사용한다.)잘 모르는 관계로 그저 일식집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우동과 돈까스. 중국에서 왠 일본식. 상항이는 역시 국제도시. 다음에는 중국식 먹자하면서 허길 달랬다.


맛도 별로 구만.

버릇대로 물티슈를 사용했는데 2위안 더 받더라. 이잉...

슬슬 불을밝히는 야경을 보면서 와이탄으로 갔다.

조계지 시절 각나라가 만들었다는 19세기의 건물들이 지금 또다시 그들 자본이 들어차 있다.

상하이는 의무적으로 야경시설을 요구하는지 거의가 이런 조명시설을 갖추었다.


서서히 불밝히는 난징동루


와이탄 거리
 

처음보는 경치라 이곳 저곳 기웃기웃 사진찍고 추운줄도 모르고 다녔다. 어리버리한게 눈에 띄는지 얄굿은 물건사라고 달라붙는 사람들이 많았다.

올땐 꼭 사려했는데 그것도 마지막날엔 보이지도 않더라.


와이탄에서 본 동방명주, 유람선

 
와이탄의 야경

이게 왠일이냐.

이먼 이국땅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다니.

경기도에 근무하시는 정용택선생님 가족을 만났다.

어찌 반가운지. 선생님은 3일 여정으로 오셔서 다니셨단다.

기념 촬영하고 바이바이


정용택선생님과

실컷 구경하고 그 긴 와이탄을 다 걷고 갑자기 인적이 드문듯한 골목길로 숙소를갔다.

나중에 보니 그곳이 옌안 동루였다.

그곳은 상하이는 공사중을 실감나게 했다.

상하이는 밤낮으로 공사중이었다. 24시간을 36시간으로 일하는듯...


상하이는 공사중


그렇게 첫날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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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0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너랑 언니 표정이 확 떠오른다. ㅎㅎ 근데 나도 언니랑은 같이 여행못가겠다. 나는 끼니 제때 못찾아먹으면 이성을 잃는데, 오후까지 아무것도 안먹다니.... ㅠ.ㅠ 상하이가 야경은 진짜 근사하네... 중국은 다니다 보면 진짜 이거 미친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규모나 노동력 동원이 심하다 싶은게 한두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대충 나은 것 같으니 설 잘보내고 와서 다음 여행기도 기대할게... ^^

아사히 2008-02-06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는 양산의 큰댁. 큰댁 시누 컴으로 잠시 서재출입. 이것도 재미있네.
진짜 자유여행의 베테랑하고 다니다 다리 찢어지는 줄 알았네.
설날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