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역사의 동남 아시아, 슬픈 오늘을 걷다 (양원옥 씀) 몇 년을 벼르고 벼르던 캄보디아 여행을 운 좋게 남편의 직장 동료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2008년에 갈려고 책도 여러 권 사보았는데 여의치 않았다가 2009년 2월에 드디어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것도 남편과 함께. 해외여행은 몇 번 있었지만 남편과는 처음이었다. 지내다 보니 남편과의 여행이 좋은 것도 많았다. 일단 무거운 짐 가방을 힘센 남편이 들어주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방을 써야하는 불편함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1. 작지만 강한 나라 베트남을 가 보다 4시간 정도 비행을 하다 노이바이 하노이 공항에 내리자 한국과 2시간의 시차를 보였다. 베트남의 천년이 수도라는 하노이는 홍강과 호안끼엠(호수)에 기대어 천만의 인구를 안고 있었다. 내가 아는 베트남은 아주 단편적이다. 최근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많이 공부하고 결혼하고, 일한다는 것, 베트남 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이겼다는 것. 그 전쟁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의 편으로 참전했다가 등을 졌다는 것(그때 만들어진 라이따이한이 2만명 정도라니 우리가 베트남에 진 빚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된다). 그 이전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동아시아문화권 속에서 우리나라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 정도. 이동하는 버스의 창문으로 보이는 것은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음(이나라는 자동차들이 깜박이 신호대신 소리로 신호를 보내다 보니 연신 경적소리가 울린다), 넓게 펼쳐진 논(3, 4모작이 가능한 날씨와 넓은 논 덕분에 쌀 수출이 세계 2위란다. 안남미라 불리는 날리는 바로 그 쌀) 하노이. 베트남의 혁명수도. 베트남의 모든 권력은 하노이에서 나온다. 총과 사상이 하노이에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는 지난 반세기이상 베트남을 지배해온 상징이며 실체이다. 이 도시는 또 세계사에 기록된 가장 유명한 전쟁과 혁명의 진지였다. 바딘 광장은 그런 하노이를 대변한다.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中> 바딘 광장은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이 베트남의 독립과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 곳이다. 여기에 호찌민의 묘와 박물관, 대통령 궁이 있다. 불행하게도 문을 열지 않는 날이라 호찌민의 묘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구경만 하였다. 레닌처럼 방부 처리된 호찌민의 시신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베트남의 국부! 정신적 지주! 로 존재하지만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호찌민은 평생 독신으로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애쓰며 살다 갔다고 한다. 인민복 몇 벌, 그가 보던 책들 몇 권(그중에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있다) 폐타이어로 만든 슬리퍼, 타자기 하나가 그가 남긴 전부로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던 지도자의 청빈함을 느끼게 한다. 장기집권으로 얼룩진 우리네 현대사와 비교되는 장면이다. 하지만 화장되길 원했던 호찌민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의 후광을 이용하려는 살아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살아 있다. 호찌민에게는 영애롭지 못한 무덤이리라. 호찌민의 묘 옆에 번쩍거리는 황금색 건물이 있어 무조건 카메라를 들이 밀었더니 멀리서 공안이 뛰어온다. 말은 안통해도 사진 찍지 말라는 것 같아 미안한 표정을 지었더니 봐준다. 하지만 이미 셔터는 눌려졌고 아무도 못 찍게 하는 대통령 궁을 나는 찍고 말았다. ㅎㅎㅎ 호찌민 묘의 뒤편에 일주사. 베트남의 국화인 연꽃을 본떠 만들었다는 호찌민의 묘와 연꽃처럼 지어진 일주사는 묘하게 통한다. 기둥이 하나라서 지어진 이름 일주사는 독특한 절이다. 암자라고 해야 더 맞는 표현일까? 리(李)왕조의 황제인 리따이톤(李太宗)이 1049년에 지은 이 사원은 익숙한 사연을 갖고 있다. 아들을 갖지 못한 리따이톤은 연꽃에 앉은 관세음보살이 아들을 건네주는 꿈을 꾸고 우연히 농부의 딸을 만나 비로 삼았는데 그 뒤 아들을 얻었고 감사의 뜻으로 이 절을 지었다 한다. 흑단나무로 만든 일주사는 왼쪽으로 돌면 딸을 오른쪽으로 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남겨져 많은 사람들을 찾게 한다. 아들과 딸을 다 가진 나와 남편은 일주사를 돌면서 마음이 불안 불안했다. 이 절의 영험을 얻지 않길 바랄뿐... 점심을 먹기 위해 시장으로 갔다. 36개 골목으로 유명한 시내. 근데 집들이 다들 좁게 높게 서있다. 주택도, 상점도 모두모두.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가 땅과 건물을 민영화 하면서 제한을 두었다 한다. 가로 4m, 세로 12m 그러니 가능한 높이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아예 옆벽은 칠도 하지 않는단다. 옆벽을 칠하지 않은 건물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베트남에서 먹은 음식은 퍼(Pho, 쌀 국수), 배가 고파서 그런가 국물 맛이 칼칼하면서도 깔끔한 것이 아주 좋았다. 이후에 퍼를 먹을 기회가 되면 우린 계속 퍼를 먹었을 정도로 한국인 입맛에 맞았다. 퍼는 보트피플 이라 불리는 베트남 난민에 의해 세계적인 음식으로 소개가 되었다 한다. 두 번째 목적지 하롱베이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4시간 정도. 우째 하루 종일 비행기와 버스로 이동만 하는 것 같았다. 베트남이 길게 뻗은 나라이므로 이동을 하려면 길게 길게 갈 수밖에 없다. 이 나라는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고속도로라도 2차선이고 제한 속도도 60km라 한다. 위반 시엔 엄격한 처벌을 받으므로 사고는 오히려 안 난단다. 기나긴 이동 시간동안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지만 중간에 같이 간 스님께서 사주신 빵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맛은 바케트였지만 엄청 부스러기가 생기고, 내 얼굴보다 큰 빵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벌써 깜깜했다. 밤이 되자 제법 싸늘해졌다. 우리나라는 지금 영하의 날씨일텐데 여긴 그래도 늦여름, 초가을 날씨이다. 방을 잡고 나서 시장 구경을 갔다. 뭐니 뭐니해도 여긴 열대과일의 나라다. 듣도 보도 못한 열대과일들을 맘껏 맛 볼 수 있었다. 특히 크림맛이 강한 두리안은 역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가장 기억에 남는 맛이었다. 다음날 일찍이 준비하고 나선 길은 대한항공 cf로 유명해 졌다는 하롱베이였다. 내가 감동에 마지않았던 영화 ‘인도차이나’의 마지막 장면이 여기 하롱베이였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저항했던 베트남의 아픈 역사가 녹여진 영화였다. 상처속의 하롱베이가 이제 이색적인 풍광을 보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의 방문처가 되어있다. 배들이 즐비한 선착장에서 커다란 배를 타고 한참을 가자 기암괴석으로 둘러싼 호수 같은 바다가 나왔다. 아무리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도 여기는 조용하단다. 그 속에 수상족이 사는 배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배위에서 태어나서 배위에서 죽는다 한다. 이 배들 속에는 학교도 있고 운동장도 있어서 축구도 한단다. 신선한 물고기를 잡아서 바로 요리해 준다. 오염되지 않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치 신선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다. 육지의 도시생활에서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너무도 많을 것이지만 세상과 동떨어져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번 여행에서 자주 많이 보게 되었다. 과연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필요이상으로 벌리고 훼손시키고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마음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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