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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세기의 핵담판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 ㅣ 마이클 돕스의 냉전 3부작
마이클 돕스 지음, 박수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인류를 수렁 속으로 몰고 간 1차 세계대전이 선포되자,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등 여러 제국은 곧 열광에 휩싸였다. 모두 전쟁은 곧 자신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의 전쟁과는 달리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으며, 전선의 군인들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1차 대전 후 전쟁의 위험성을 깨달은 프랑스, 영국은 전쟁만은 피하고자 했으나, 히틀러와 도조 같은 독일과 일본의 미치광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5,000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2차 대전을 겪은 후에야 인류는 이제 전쟁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만약 다음 전쟁이 핵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승자와 패자 모두 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전 이후 공개된 문서를 보면 미국에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터트리지 못한 이유는 소련이 핵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만약 미국이 핵을 사용할 경우 자신들의 땅에 소련이 핵을 터트릴 것이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이를 저지했다.
마이클 돕스의 『1962 세기의 핵담판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 이 책은 인류가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케네디와 미국의 힘에 소련이 굴복해서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한 것이 아니었다. 소련이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는 대신에 미국은 이미 건설되어 있던 터키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했다. 이는 13일 간에 걸친 담판의 결과였다. 전쟁을 각오했던 카스트로는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소련은 그의 요구를 거절했으며 최후에는 그를 버릴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기에 그 후에도 오랫동안 쿠바의 유일한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그에 반해서 그 약속을 한 케네디는 1년 후 암살되었으며, 흐루쇼프는 곧 실각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최후의 승자는 장기 집권을 이어간 카스트로였다. 그 13일간의 긴박한 이야기를 알아보자.

쿠바에 미사일 기지가 건설에 대한 의혹이 백악관에 전해지자 케네디는 믿지 않았으며, 이런 회의에 참석하는 자체를 싫어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영웅이자 3,000개가 넘는 핵무기를 통제하던 커티스 르메이는 거친 어조로 적국을 ‘석기 시대’로 돌려놓겠다고 했다. 케네디가 쿠바를 침공할 경우 베를린에 소련군이 오는 상황을 걱정하자, 커티스 르메이는 미국의 확실한 핵 우위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소련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케네디는 미국이 핵을 월등하게 많이 보유하고 있는지도 확신하지 않았으며, 만약 ‘핵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그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미국도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이를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 과정이 바로 1962 이 책에 담긴 13일 간의 핵담판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이 터진다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카스트로는 왜 자국의 핵배치에 가장 적극적이었을까? 쿠바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게릴라군이 반혁명 전선을 펼치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쿠바의 국민들이 자신을 계속 지지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바다 건너 미국이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한다면 도저히 막을 수 없었기에 또 다른 강대국과 동맹을 맺고 싶어 했다. 그는 핵 배치로 미국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북쪽의 누구처럼 핵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미국의 침공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62 이 책은 13일 간의 기록에만 그치지 않고, 이 사건이 그후 국제정세에 미친 영향도 담고 있다. 쿠바의 미사일이 미국의 엄포가 아닌 터키의 미사일 기지 철수를 조건으로 얻어낸 것이란 사실을 몰랐던 미국인들은, 베트남에서도 똑같이 미국의 힘을 한번 보여주면 곧 꼬리를 내리고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으나 베트남전은 달랐다. 베트남은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몰랐던 미국을 전쟁의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미국에 힘의 차이를 느끼고 굴욕을 받았다고 생각한 소련도 다시는 전략적 열세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군사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역사적 반전이 일어났다. 이런 군사력 확장이 궁극적으로 소련을 붕괴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엄청난 영토와 자원을 보유한 구소련이란 나라도 끓임 없이 증가하는 군 예산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은 그들의 예상과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냉전에서 승리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전쟁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전환점이었다. 이 위기 이전에는 커티스 르메이와 미군 수뇌부는 압도적인 전력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적을 ‘석기시대’로 돌려놓을 수 있기에 선제공격을 선호했다. 그러나 미사일 위기가 끝난 후에는 이런 주장을 하던 장군들조차도 냉전 승리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했다. 자신들도 ‘석기시대’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