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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2 -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ㅣ 일본인 이야기 2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10월
평점 :
직장 생활을 하다 대학원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그때 지리학 강의 도중 한·중·일 삼국이 서양 학문을 받아들일 때 우리나라는 지리학을 제일 먼저 받아들였으며, 중국은 천문학, 일본은 해부학(의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고 했다. 서양학자들이 우리나라에 지리학을 가장 먼저 소개한 이유는 중화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과서가 사민필지(지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할 일본인들은 왜 해부학(의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 기원은 난학에서 출발한다. 형장에서 인체를 처음 해부해 본 스기타 겐파쿠와 같은 의학자들은 인체구조가 중국의 의학서와는 달랐지만, 난학과는 일치하는 것을 보고 해체신서 등을 발간한다. 즉 난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이때까지 읽은 대부분의 책은 난학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의 저자는 난학은 진보가 아니며, 퇴보였다는 다소 충격적인 글로 책을 시작한다.
난학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새로운 시각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다소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일본, 에도시대의 일본. 이때의 일본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조선통신사 등의 내용과 달리 경제적으로 조선을 압도했으며, 특히 군사력에서는 명나라나 청나라 오스만 튀르크와 함께 세계 3대 강국으로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쇄국정책은 서양 전체가 아닌 네덜란드의 문물만 받아들였기에 이전에 비해 분명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부유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굉장히 고달팠다. 조선에 비해 일본의 세율은 매우 높았으며, 봉건제 자체가 가지는 모순점도 컸다. 피지배 계층의 일본인의 인권은 매우 낮았으며, 어느 정도 계급이 되면 일반 백성을 함부로 죽일 수 있었다. 사쓰에이 전쟁도 영국인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는가. 이 책을 통해서 근대 이전 에도 시대의 일본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몇 가지 예로 마비키와 조선의 인권을 예로 들까 한다. 이는 갓난아이를 산채로 죽이는 풍습으로 일본에서는 성행했지, 다른 나라는 몰라도 조선에서는 성행했다고 보기 힘들다. 저자는 조선 시대 북방의 예를 들었으나, 조선시대 북방이 어떤 곳이었나? 삼남 지방의 천민이 강원도나 황해도 이북으로 이주하면 면천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벼슬까지 주었다. 그만큼 살기 힘든 곳이라 일반 백성은 가지 않으려고 했고, 도망친 사람들이 주로 가는 곳이었다. 조선은 경제력은 낮았으나, 환과고독으로 불리는 사회적 약자의 구휼에 최선을 다하는 나라였다. 그리고 조선의 천민들과 백성들의 인권은 지금보다는 낮았지만, 당시에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조선 시대의 공노비의 출산휴가가 며칠인 줄 아는가? 100일로서 지금의 기준인 90일보다도 더 높은 수준이었다. 조선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을 위해서 솔정(보호자)까지 부역을 면해주고, 기근이 들면 곡식을 내려주었다. 나이 80이 넘는 사람이라면 천민이라도 면천해주고, 벼슬을 주었다.
형조에서 전지하기를,
"경외공처(京外公處)의 비자(婢子: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傳旨刑曹 : 京外公處婢子産兒後, 給暇百日, 以爲恒式 (『世宗實錄』 1426년 4월 17일)
형조에 전교하기를,
"경외의 여종[婢子]이 아이를 배어 산삭(産朔)에 임한 자와 산후(産後) 1백 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使役)을 시키지 말라 함은 일찍이 법으로 세웠으나, 그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그전대로 구실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되니, 한갓 부부(夫婦)가 서로 구원(救援)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역인(使役人)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 하였다.
敎刑曹: "京外婢子孕兒臨産朔與産後百日內, 勿令役使, 已曾立法。 其夫全不給暇, 仍令役使, 不得 救護, 非徒有乖於夫婦相救之意, 因此或致隕命, 誠爲可恤。 自今有役人之妻産兒, 則其夫滿三十日後役使。(『世宗實錄』 1434년 4월 26일)
그리고 조선의 천민들은 주인이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자신의 노비를 함부로 죽이면 처벌을 받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최유원(崔有源)이란 사람이 그의 종을 때려서 죽였으므로 형조에 명하여 이를 국문(鞫問)하게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형률에, ‘주인으로서 노예(奴隷)를 죽인 자는 죄가 없다. ’고 했으니, 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분별을 엄하게 한 것이며, 또 ‘주인으로서 노비(奴婢)를 죽인 자는 장형(杖刑)을 받는다. ’고 했는데, 이는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노비(奴婢)도 사람인즉 비록 죄가 있더라도 법에 따라 죄를 결정하지 않고, 사사로이 형벌을 혹독하게 하여 죽인 것은 실로 그 주인으로서 자애(慈愛) 무육(撫育)하는 인덕(仁德)에 어긋나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有崔有源者打殺其奴, 命刑曹鞫之, 仍曰: "律云: ‘主殺奴隷者, 無罪。’ 此則嚴上下之分也。 又云: 「主殺奴婢者, 服杖罪。」 此則重人命也。 奴婢亦人也, 不依法決罪, 而酷加刑杖以死, 實違其主慈愛撫育之仁, 不可不治其罪也。" (『世宗實錄』 1430년 12년 3월 24일)
학교에 다닐 때 배운 역사가 지금 보면 거짓인 것이 정말 많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통신사로 대표되는 조선의 앞선 문물은 거짓이었으나, 막장 수준으로 배웠던 조선의 인권은 오히려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후기의 사회 이미지는 기상이변으로 세계적으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던 시기였음을 감안해야할 것이다. 이를 감안하고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