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역사와 문화 산책 - 다정 김규현의 히말라야의 꿈 2 다정 김규현의 히말라야의 꿈 2
김규현 지음 / 글로벌콘텐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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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नेपाल)이라는 국명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것으로 그 의미는 '신의 보호를 받는 땅'이라는 의미이며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유명한 룸비니(लुम्बिनी)가 네팔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나에게 네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구르카 용병이다이 책은 사실 네팔 그 자체보다는 구르카 용병에 대한 궁금증에서 읽기 시작한 책이다.

 

우리에게 구르카 용병으로 널리 알려진 이 집단의 명칭은 바로 네팔의 마지막 왕조인 샤흐 왕조의 본거지인 고르카란 지명을 딴 것이다이 책에 의하면 고르카는 중세 힌두의 전사이자 성자인 고라크나트(Gorak hnāth)는 하타 요가의 창시자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샤희 왕조가 통치할 때 네팔의 영토는 지금과 같은 규모로 늘어났으며이는 모두 용맹한 고르카 군대의 공이었다고 한다고르카 군인들이 이 시기의 네팔 지역에서의 무용담만으로 전 세계에 용맹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르카 용병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1814 ~ 1816년까지 벌어진 영국과의 전쟁 때문이었다굽시니시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보면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몰려왔을 때 베이징 안에는 여전히 8만 6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남아 있었지만 싸우기도 전에 흩어져 버렸다원명원이 불타고 있을 때는 근왕군 10만 명이 베이징으로 향해 오고 있었지만 청조는 전쟁의 지속이 아니라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 것을 택했다그러나 고르카 전사들은 쿠크리( kukri)란 단검 하나만 손에 쥐고 당시 최신 무기를 손에 든 영국군 부대를 크게 괴롭혔다


영국은 이들의 용맹함 하나만 가지고 용병으로 채용한 것은 아니었다그들은 점심시간이나 티타임에는 전투를 중지할 것을 통지하는 등 매우 신사적인 행동을 했으며전쟁 막바지에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등 전투 이외의 면에서도 영국에게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전쟁 후 영국은 이들에게 용병을 제안하고 고르카의 전사들은 이를 수락한다. 19세기 초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맞서 싸우던 전사들이 이제 영국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 세계에게 용맹을 떨치게 되었다.

 

1차 대전에서만 20만 명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지만무려 4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선전전이 유행한 2차 대전에서는 독일과 일본군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서 영국의 이들의 무용담을 적극 활용했다고르카 용병의 용맹함은 이제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과거에는 저렴한 가격에 채용하는 용맹한 전사였으나 이제는 국제 인권 단체의 활약으로 거의 동등한 급료를 받는다고 한다그러나 이렇게 높아진 인건비 때문에 고르카 용병제도는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한다그러나 영국 외에도 인도싱가포르 등의 나라에서도 고르카 용병을 채용하고 있다고르카 용병의 무용담은 이제 전쟁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등을 통해서 널리 퍼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네팔에 대해서 느낀 아쉬운 점은 바로 카스트 제도이다네팔에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남아 있으며네팔 전체 인구의 20%가 달릿 카스트라고 한다이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40대 초반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우리나라는 이제 거의 80네팔의 평균 수명이 60대 후반인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그러나 네팔이 이렇게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네팔은 1년 내내 축제가 이어지는 축제의 나라이다새해맞이힌두 축제불교 축제가족 축제교육 축제농경문화 축제목욕 축제 등이 연일 계속 이어진다국제기준으로는 빈곤한 나라이지만 그들은 마음은 풍요롭고 그들의 환경 속에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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