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와 역사 - 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 What's Up 8
조르조 아감벤 지음, 조효원 옮김 / 새물결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145쪽부터 나오는 도표에서 공시태와 통시태가 서로 뒤바뀌어 있습니다-번역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8-09 0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아기와 역사>>의 번역자입니다. 145쪽부터 나오는 몇 개의 그림/도표들에서 공시태와 통시태가 서로 뒤바뀌어 있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혼동/실수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
존 키건 지음, 정병선 옮김 / 지호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한국은 '휴전국가'다. 인권과 자유, 평등에 대한 온갖 요란한 구호와 논쟁들이 활개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휴전국가이기 때문에 한국은 이 행성에서 가장 후진 나라들 중 하나다. 휴전상태인 까닭에 정치, 경제, 문화를 비롯한 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한국은 얼마 쯤씩 일그러져 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전쟁에 대한 잠재적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공포는 지구깡패 미국이 수행하는 거룩한 전쟁들--베트남전과 걸프전,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전에 이르기까지--이, 미국과 첨예하게 맞서는 북한과의 한반도전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합리적 논리적 추론 때문에 더 증폭된다. 이러한 공포는 어떤 이들에게는 '좋은 세상'을 위한 조건일 수 있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살맛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의 수치와는 반비례하게, 전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주 형편없다. 사실, 전쟁에 대해 제대로 알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것은 사랑 혹은 정치만큼이나 정의내리기 힘든 말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건 옳지 않다. 완벽히 알 수는 없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더 잘' 알 수는 있다.

'살아있는 군사 역사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존 키건이 쓴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가 내린 정의를 보자. "전쟁은 어떤 집단적 목적을 위해 행하는 집단적 살인이다." 간단해 보이는 이 문장에서 우선 살펴볼 것은 전쟁의 본질이 '살인'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끔찍한 범죄의 주체가 '국가'라는 거대하고 모호한 실체라는 이유 때문에 전쟁의 범죄성은 대개 은폐된다. (물론 그러한 '은폐'의 과정은 극도로 복잡하고 교묘한 조작이 수용자의 집단심리와 상호 작용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다음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집단적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전쟁국들이 처한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통찰이 가장 중요하다. 전쟁의 역사를 공부해보면 수없이 다양한 전쟁의 양태들 속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정치경제적 원인을 볼 수 있다. "전쟁은 재정적 정서적으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그래서 부유한 나라들도 이용 가능한 기술적 인적 자원을 최대 잠재력까지 끌어올리며 수행하기에는 벅찬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상황이 가난한 나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적들, 통제력이 무너진 국가의 파벌들에게는 값싸고 치명적인 사없이 되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전쟁의 목적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전쟁의 양태라 할 수 있다. 에너지 자원 확보라는 가장 보편적인 목적을 가진 전쟁이라 해도, 수많은 개인들이 청동검을 휘두르며 치른 전쟁과 버튼 하나로 한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전쟁은 너무나 다르다. 이렇게 볼 때, 이전 시대와 오늘날의 '전쟁 공포'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존 키건은 핵과 같은 대규모 살상 무기보다도 오히려 소총과 같은 개인화기로 수행되는 소규모 전쟁으로 죽어가는 인류의 수가 더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비핵화 선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각국의 정부가 나서서 그러한 무기의 판매 및 무역을 적극 규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는 "냉전 시기 내내 지속된 공포의 균형이 핵전쟁을 예방해 주기는 했지만 우리가 핵전쟁을 영원히 피해갈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 나는 낙관적이다. 인간은 변덕스럽고 무모한 종(種)이지만 합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세계 대부분의 주권국이 핵무기를 영구히 보유하지 않겠다는 비확산 조약에 서명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IAEA를 통해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비핵화를 선언했지만, 정작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 특히 미국은 계속해서 핵무기를 개선, 확대하고 있고 또 그것을 통해 무역 상대국들에게 파렴치한 경제적 압박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또 파키스탄 등 몇 몇 나라는 그 조약을 무시하고 핵무기를 개발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은 미국의 은밀한 지원 아래 핵무기를 보유하기까지 했다.(<<한국인을 위한 교양사전>>,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참조) 과연, 키건의 말처럼 인간은 합리적인(그 말의 어원적 의미에서 계산적인) 존재인가 보다. 미치광이 이론을 통해 전지구를 전쟁 공포에 사로잡으며 미국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경제적 이익이니 말이다.

핵전쟁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태를 대하면 머리와 가슴이 한없이 무력해지고 멍해진다. 전쟁이 뭔지, 또 왜 일어나는지 알아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하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건 결국 인간의 이성인데, 전쟁의 강력한 후방 지원부대로 전락한 미디어가 인간 이성의 계몽을 철저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쟁을 막지 못해도, 그래서 죽임 당하더라도, 왜 죽는지 알고 죽는 게 좀 더 나은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붕괴 대원동서문화총서 21
조지프 A.테인터 / 대원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극단의 시대>>라는 책이 있다.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은 모르겠으나, 그 제목이 참 섬뜩하다 느꼈다. 이 제목의 현실성을 확인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한 시간 짜리 뉴스를 띄엄띄엄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온갖 사건과 폭동, 테러, 분쟁, 한마디로 난리들이 '극'을 달리는 세상 아닌가.(뉴스를 포함한 미디어 자체도 그러한 난리의 한 주역임을 말해두자.) 그런데 이러한 난장판 세계에서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세계가 곧 멸망하고 말 거라는 종말론적 분위기다. 잊을 만 하면 찾아오는 재난영화들이 보여주는 '가까운 미래'의 세계는 모두 폐허다. 광속과 광란의 문명이 붕괴돼 버린 황량한 세계에서 인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이크는 북부 우간다의 가장 혹독하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종족이다. ...식량과 물이 턱없이 부족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한다. 협동이나 사회적 공유에서 누릴 수 있는 이득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이크족의 생활공간에는 사회적 조직이 끼여들만한 여지가 거의 없다.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진 이크족 사람들은 대부분의 활동을 독자적으로 한다. 먹을 것도 각자가 조달한다. ...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형제나 친척 사이라고 해도 누가 배를 곯는다고 해서 도와주는 법은 없다. 형제나 일가친척이야 굶어죽건 말건 내 입이 우선이다. ...아이들은 세 살까지만 엄마가 최소한으로 돌볼 뿐 그 다음부터는 혼자서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 엄마는 아이가 일단 세 살을 넘기면 매정하게 보살핌을 끊는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들판을 헤매고 다닌다."

<<문명의 붕괴>>의 저자 조지프 테인터는 "이크족의 생활상을 지구 규모로 확대한 그림", 즉 '홉스의 세계'가 재난 영화들의 주된 시나리오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나치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과거에 무너진 문명들의 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원제가 The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인 <<문명의 붕괴>>는 "한계수익감소"라는 원리를 가지고 '복잡한 사회'가 붕괴되어 가는 사태에 대한 보편이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붕괴에 대한 기존의 설명틀-자원의 고갈, 새로운 자원, 재난, 상황에 대한 불충분한 대응, 다른 복잡한 사회들의 존재, 침략자, 갈등/대립/무능/, 사회적 기능마비, 신비적 요인들, 우연적 사건들의 연속, 경제적 설명-을 하나하나 실제 사례들과 대조해가며 그 장단점 및 한계를 상술한 후에 저자는 한계수익감소의 원리가 붕괴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설명틀임을 논증하고 있다. 요컨대, 복잡한 사회는 일정한 시기에 도달하면 한계수익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감소하게 되는 까닭에 붕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이렇다.

1. 인간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이다.
2. 사회정치적 체제는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유지된다.
3. 복잡성이 증가하면 단위 비용도 증가한다.
4. 문제 해결을 위한 대응으로서 사회정치적 복잡성에 대한 투자를 하면 한계 수익이 감소하는 시점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면 먼저 붕괴에 대해 알아보자. 붕괴란, "일정한 단계 이상으로 확립된 정치사회적 복잡성의 수준이 급격하고 현저하게 상실"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복잡성이 급격히 해체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잡성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인간이 이런저런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사회가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에너지(자원)가 필요하게 마련이고, 에너지의 분배와 관리를 위해서 조직이 생겨나게 된다. 이성적(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인간 집단은 보다 구하기 쉽고 효율적인 자원을 우선적으로 사용할 것이고 당연히 그런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게 되면 점차적으로 "조달, 처리, 공급, 판매에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자원을 이용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 하나하나의 필요성 때문에 복잡성은 점점 증가하게 된다. 이 과정을 좀더 자세히 보자.

"복잡한 사회는 단순한 사회보다 유지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1인당 투입되는 에너지도 당연히 높다.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할수록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는 연결망도 복잡해진다. 처리되는 정보의 양도 늘어나고 정보의 흐름은 점점 중앙으로 몰린다. 생산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전문가의 수도 불어난다. 이러한 유형의 복잡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는 소규모의 채집 생활 집단이나 농경 생활 집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투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조직체계를 유지하는 데 투입되는 에너지가 전체 에너지 예산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늘어난다."

따라서 "한 인구집단이 복잡성에 얼마나 투자하고 거기서 얼마나 이익을 얻는지를 공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한계수익감소에 대한 문제다. 저자의 한계수익이란 용어는 경제학의 '수익체감의 원리', 혹은 '한계생산성'을 변용한 것인데, "수익체감의 원리는 경제학자들이 '법칙'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의 규칙성과 예측가능성을 가진 보기 드문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한계수익감소의 '법칙'도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농업과 자원생산은 물론이고, 정보처리, 관료조직과 전문화까지도 포괄한다.

그렇다면 복잡성이 증가하고 한계수익이 감소한 사회는 모두 붕괴하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의 국가들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해져 있는데도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조지프 테인터는 '호각체제'를 이야기한다. "붕괴는 체제와해의 정치적 공백을 너끈히 채울 수 있는 강력한 경쟁자가 없을 때만 나타난다. 그런 경쟁자가 있을 때에는 붕괴가 일어나지 않는다. ... 호각체제가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는 이들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강력한 외부 경쟁자가 없을 때만 붕괴가 발생해서 이들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한마디로, "붕괴는 권력의 진공상태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것은 이전 역사 속의 '붕괴'가 아닌 인류의 총체적 종말이라 할 수 있는 '공멸'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불기둥이라 찬양하는 핵이 그러한 공멸의 가장 직접적 수단이 되겠고. 맨해튼의 백인 거부들의 삶이 이크족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면, 다시 또 묻게 된다. 과연, 인류는 잘해나갈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글쓰기를 두고 내공이니 진검승부니 따위의 무협지 말들로 짐짓 비장한 체 하는 이들이 있다. '말'은 그저 '말'일 뿐, 나의 눈물과 너의 웃음, 너의 피와 나의 땀에 맞닿아 있지 않다. 언어가 현실을 담아내고 혹은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결코 언어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언어는 그 자체로 몸을 가진, 따라서 눈물과 웃음과 피와 땀을 가진 현실존재다. 그러니 언어의 눈물에 젖어보지 못한 자가 글쓰기 내공을 말하고 말의 피범벅에 질척거려 보지 못한 이가 글쓰기 진검승부를 떠들어 대는 건, 우습지도 않다.

말은 누구나 할 줄 알지만 제대로 말하는 이는 드물다. 글은 누구나가 쓸 수 있으나 '읽히는' 글을 쓰는 이는 더더욱 귀하다. 언어를, 활자화된 문자와 말된 말, 즉 의미 되어진 소리라 생각 않고, 사람 '사이'에서 인간-세계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여긴다면, 말을 하고 글을 쓰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사태는 오늘날 그저 '5.18'로 축약되어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5.18'이란 말을 한다/쓴다는 것은 그 시간 그 곳에서 피 흘리고 눈물 쏟았던 뭇 인간들과 그 사건과 상황을 우리-나와 너-의 존재 속에 각인시킨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반복과 습관은 인간성의 가장 위험한, '보이지 않는 적'이다. '무심코' '반복해서' 쓰다 보니 정작 그 '사건'과 '사람'은 사라지고 말만 남은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말들이 마치 유전자 변형 감자마냥 마구 쏟아져 나오는 세계는 처리할 길 없는 '言시체'들로 뒤덮여 있는 지도 모른다.

공부 또한 그렇다. 글된 말과 무수한 기호들로 이루어진 '책'을 통해 공부라는 행위는 이루어진다. 인문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공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무심코 말하듯, 무심코 공부하는 행위는 무가치하다. 아니, 惡하다. 내 공부가 결국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주고, 그를 어떤 상황에 처하게 만들지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는 공부는 결국 공부라는 이름에 합당치 못하다. 그러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공부'다. 아니, 그저 머리를 굴리는 '짓'이다.

'너'야 어찌되건 말건 내 공부를 통해서 내 배부르고 등 따숩게만 된다면야 하고 생각한다면 그리 해도 된다. 다만 기억하라. 너와 '같은' 공부를 한 누군가를 통해 네 배가 터지고 네 등이 꺾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몸으로 하는 공부'는 '몸으로 하는 반성'이다. 피떡이 되도록 맞아보거나 눈 앞이 흐릿해질 때까지 벌을 당해 본 이는 몸으로 하는 반성이 얼마나 절실한 지 알 거다. 말 안 들으면 개패듯 패야한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하는 짓이, 내 삶이 그러했을 수도 있었을 무수한 '너'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알아야 한단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렴 어때 난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이에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걸 상기시켜야 겠다. 이 책 <<몸으로 하는 공부>>는 '몸으로 하는 반성'의 첫걸음을 떼는 데 도움이 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5-08-30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단숨에 읽히네요!
'이주의 리뷰' 따라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