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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F, 미스터리, 현실성이 녹아든 장편소설, ⟪오렌지와 빵칼⟫은 표지 색부터 많은 생각을 준 책이었다. 왜 빵칼일까? 인용한 문장에서도 빵칼은 오렌지를 썰 수는 없지만 쑤실 수는 있다고 쓰여있다. 오렌지는 비슷하게 생긴 귤과 달리 껍질이 두껍고 크기도 크다. 전용 칼이 나오기도 했지만 손톱으로 깔 수 있는 품종이 더 흔하다. 단지 빵칼은 울퉁불퉁하고 오렌지 전용 칼은 일반 식칼처럼 둥그스름해도 날카롭다. 그래서 가정용 식칼로 꼭지를 둥그렇게 따거나 윗면을 자르고 옆면을 두께만큼 잘라서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빵칼로 쑤시면 맞지 오렌지 과즙이 터져 나온다. 광고로 나오는 오렌지는 상큼하고 시원한 이미지인데 실제로 과즙은 온도마다 차갑거나 미지근할지언정 상쾌하지 않고 좀 끈적거린다. 빵칼로 여러 번 쑤시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왜 작가님이 다른 과일이 아닌 오렌지를 쓰셨는지 모르겠다. 오렌지가 가진 상큼하고 활기찬 이미지 때문일까? 과거 오렌지가 쉽게 먹을 수 없는 과일이었기 때문에? 이유는 모르지만 이 오렌지가 사람을, 오영아를 비유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오영아, 유치원 교사고 잘 웃고 잘 배려하고 잘 참는 게 장점이라고 한다. 친구, 남자친구, 유치원 원아가 나오지만 이 인물, 사회 속에서 영아는 자신을 억압해왔다는 거다. 이걸 억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사회생활하면서 남이 피해를 보지 않게 내 행동, 언행을 바꾸고 생각을 달리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회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장이고 거래란 원하는 사람이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오영아는 친구가 옳고 남자친구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의 일상 속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를 감당하고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은 뺄 수 없게 됐다.
친구처럼 사회를 바꾸는 청원에 동의하고 친환경 활동을 지지하고 그 올바름을 배우려고 하지만 그게 정말 오영아가 바란 거였을까? 힘든 상황에서도 어머니를 부양하고 일하고 자신을 챙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지 않는 건 문제일까? 참지 못하는 난 이상한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미소? 자유? 그게 뭐든 나쁜 사람이 됐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주인공의 독백, 대화, 행동을 보면서 어떤 상황이든 오영아는 자기 자신을 통제해 왔다는 걸 느꼈다. 남을 바꾸기보단 나를 바꾸는 게 편한 사회를 적응하려면 자신을 깎을 수밖에 없다. 마치 면접을 보기 위해 내가 적합한 인재라고 피력하듯이. 잘 하고 싶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다. 우리가 불안을 안고 사는 것처럼 완벽 혹은 이상을 좇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인데 왜 즐겁지 않을까? 왜 난 저들처럼 착해지지 않을까? 또 뭘 해야 할까? 달라지면 나을까? 착해질까?
우리는 왜 희생할까? 옳음을 쫓지 않으면 왜 바보가 되고 나쁜 사람이 되는 걸까? 모두 같지 않지만, 차이는 간단하다.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우리는 태어날 때 조금만 걸어도 칭찬받고 벽에 크레파스로 낙서해도 천재 소리를 듣기도 한다. 아기의 장난으로 생각해서? 천재가 태어났다는 기대 때문에? 이유는 모르지만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곤 가족, 친구, 사람들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수용해 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그 수용이 사라진다.
"왜 그 정도도 못해?"
날 위했든 아니든 한곳에 몰린 비난, 지적은 혼란스럽게 만든다. 원래 하던 방식으로는 칭찬받을 수 없고 수용 받을 수 없으니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부모님이 좋아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공부하기 싫지만 공부하면 돈 주고 칭찬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공부하는 아이나 화장을 잘하고 운동을 잘하면 좋아해 주는 친구들을 보고 더 노력하는 아이나 다른 사람에게 수용 받으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렌지와 빵칼⟫ 속 오영아가 친구가 말한 옮음을 실천하기 위해 청원에 동의하러 다니고 친환경 소재를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그 예다.
타인에게 거부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좋지만, ⟪오렌지와 빵칼⟫은 오영아가 뇌 시술을 받으면서 우리 일상에 드러나지 않은 억눌림과 수용 받고자 하는 마음을 꼬집어낸다. 뇌 시술은 그 수용 받고자 하는 부정적인 자기개념, 즉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이 책은 도서를 제공받고 읽은 뒤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내가 싫죠? 오늘부터 확실히 싫어해도 돼요" - P121
다시 한 번 되새김질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애인, 좋은 친구, 좋은 교사, 좋은 사회구성체.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원래의 나로.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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