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녀 저격수 ㅣ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84
한정영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4년 8월
평점 :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잊고 싶은 역사도 있다. 길 한복판에서 발을 헛디뎌 대차게 넘어지는 순간, 혼자 간직하려던 마음을 홧김에 내뱉은 순간, 여러 순간이 있고 흑역사라고 종종 부른다. 역사란 무엇일까? 기억한다는 건 무엇이고 기억하지 않는 무엇일까, 사실 잊겠다고 결심해도 떠오르는 게 기억이다. 마음처럼 기억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전해지는 역사에는 내가 모르는 순간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물론 오늘 소개할 ⟪소녀 저격수⟫ 는 소설이다. 일부 실제 역사를 기반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소녀 저격수⟫ 는 그 순간에도 그들이 존재했다는걸, 그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다는 걸 일깨워 주는 책이다.
처음 소개 글을 봤을 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표지가 준 영향이 컸다. 총구에 비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였다면 총성으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간략히 나온 줄거리만으로도 흥미로웠다. 간혹 꿈을 꾸면 이게 현실일까? 궁금해지는데 ⟪소녀 저격수⟫ 속 주인공 설아는 독특한 꿈을 꾼다. 몸이 찢기고 숨이 차오르는 긴박한 순간, 너무 추운데 총성도 들린다. 그런 자신을 간호하는 할아버지는 유일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애틋하고 따뜻한 미래가 기다릴 것 같다.
사실 소개 글에서도 짐작했듯 설아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고 총을 쏘는 장면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 설아가 누구이고, 저 족쇄에 새겨진 번호가 무엇인지 짐작해야 했다. 앞 글자 733을 보고 731 부대인가? 짐작했지만 아니길 바랐다.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잊어선 안될 역사 중 하나지만 ⟪소녀 저격수⟫ 를 읽으면서 우려가 큰 부분이기도 했다. 설아는 한 사건을 계기로 빈사 상태까지 치닫고 기억도 잃었다. 자신을 보살피고 챙겨 주던 할아버지에게 물어봐도 부모님이 설아를 아꼈다는 것, 지금은 옆에 없다는 것, 좋은 이었다는 것, 그 정도였다. 왜 자신이 아팠던 것이며 기억나는 게 없는데도 따지지 않는지 할아버지는 설아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 평화를 깨듯 사건은 서서히 설아의 목을 조이는 거 같았다. 아픈 할아버지를 대신해 토끼 두어 마리를 잡았지만 혹독한 추위와 함께 굶주린 늑대가 설아를 쫓았고 실제로 물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산 중턱에서 짐승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설아의 상황은 지금 내가 사는 사회 보다 더 이전이니까, 마음을 졸이면서 나무를 올라타는 방법, 가지를 부러뜨려 대항하는 법(주위에 무기로 쓸만한 변변찮은 게 있는지 모르겠으므로), 이것저것 생각했지만 설아가 몇 살인지도 얼마나 강인한지도 몰랐다. 소설 초반부에는 설아는 소녀로 나오고, 설아로 나온다. 독자 나름대로 긴박한 장면을 읽으며 짐작할 뿐 주어진 단서가 부족했다. 그래서 설아가 기지를 발휘해 몸이 찢겨도 늑대를 제압하고 도망치는 걸 보면서 만만찮은 일이 펼쳐지리라 짐작했다. 뒤이어 일본군이 나타나 할아버지의 총포를 빼앗고 협박하고, 그 자리에서 잃는 모습을 보면서 설아가 복수를 시작하리라 생각했다.
기억을 잃어서인지 중간중간 꿈을 꾸는 장면이 있다. 처음에는 저 따옴표 속 말이 설아 이전 기억인가?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저 단호함 만큼 설아가 총을 쏘는 순간은 심장이 멈추는 거 같지만, 사실 후반으로 치닫기 전까지 설아는 쉽게 무언가를 결단하지 못한다. 언뜻 ⟪소녀 저격수⟫ 는 설아의 복수를 보여줄 것 같지만 사실 기억을 잃은 설아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에 가깝다. 그래서 김이 샌 느낌이 없잖아 있다. 내가 바란 장면이 없어서이지만 민포수(할아버지), 원주댁, 윤길주, 백두 대장을 거치면서 설아라는 인물이 자신을 되찾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사진에서 또 다른 목소리는 설아에게 저격할 때 심장, 머리를 겨냥하라고 한다. 한 번에 죽여야 하니까.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기억을 잃은 설아는 머리와 심장, 즉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꺼림칙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그걸 막지 못한 것에 자책하는 설아 앞에 사실 할아버지의 손녀가 아니라는 사실은 설아라는 인간이 쥐고 있던 뿌리를 놓친 것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설아는 따로 성씨가 나오지 않는다. 뒤이어 진짜 이름이라 칭해지는 다른 이름이 나오지만 그게 진짜인지 알 길이 없다.
설아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언뜻 설아의 복수는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지만 자신을 위한 여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손녀 '설아'가 아니라면 자신은 누구란 말인가? 복수하려고 의지를 다지고 일본군을 저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롯이 설아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고 추측했다. 단지 절정에 오르다가 멈춘 느낌이 들어서 아쉬움이 크다.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심장을 겨눈다면 그건 너희가 될 거야. - P1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