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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체가 보고 싶은 날에는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시공사 / 2025년 4월
평점 :

나를 알고 있는 할아버지, 젠지로.
단지 경비원이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
말하자면 이곳은 자살 명소다.
지은지 60년이 넘은 오래된 단지.
삶보다는 죽음과 가까운 이곳에
미카게는 언니와 함께 남겨졌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남자와 함께 도망갔다.
괴롭힘을 피해 야간 학교를 다니고, 빵 공장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밤에 일을 나가는 언니와 함께 매일을 살아내고 있다.
그러던 미카게의 일상에 단지 경비원을 자처하는
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미카게의 이름을 계속 부르더니,
마지못해 나간 그녀에게 대뜸
오늘부터 경비 일을 하는 거라고 말한다.
어쩌다 보니 빵과 포카리 스웨트가 들어있는 배낭을 메고
젠지로 할아버지와 함께 B동의 단지 경비를 하던 미카게는
이 일을 하다보면 시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체를 보고 싶은 소녀, 미카게.
마음을 읽는 듯한 할아버지, 젠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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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는 것,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미카게의 순수함에 걱정이 되는 한편,
그녀의 곁에 좋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카게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언니, 나나미.
야간학교에서 비로소 만나게 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 무짱과 구라하시.
빵 공장 아르바이트에서 종종 봉지에 빵을 챙겨주는 나가사카.
단지 경비원을 하자며 무작정 끌어들인 건 줄 알았더니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도움을 주고 있었던 젠지로까지.
자살 명소라 불리는 낡은 단지에서
언니와 함께 살아가면서도
천식 때문에 약한 몸을 탓하며 꿈이라는 것을 꾸는 것보단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하고 싶었던 미카게에게
단지 경비원은 하나의 전환점이자 활력소가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썩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시체를 보고 싶은 것이 처음 가져보는 욕망이었으니까.
혼자 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찾아가
생존 확인을 하고 때로는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며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던 지난 날을 벗어나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젠지로 할아버지는
미카게의 마음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았던 걸까.
아니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던 마음의 짐을
그렇게라도 속죄하고 싶었던 걸까?
순수하기만 했던 미카게의 변화가
급격하게 그려지지 않아서 더 좋았다.
만약 급격하게 똑똑해지거나, 냉정해지거나,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오히려 현실성이 없다고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언니, 나나미가 하는 일이 데리헤루 라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화를 낸다거나, 짜증을 내는 대신
용기를 내어 언니에게 진심을 전하는 장면은
미카게가 단지 경비원을 하면서 바뀌게 되었음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젠지로 같은 할아버지가 주변에 있다면
나나미 같은 언니가 곁에 있다면
무짱과 구라하시 같은 친구가 가까이 있다면
변화를 맞이한 미카게의 앞날은
이제 죽음보단 삶에 더 가깝지 않을까.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전혀 자극적이지 않았던,
그래서 더 좋았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