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버드 - 그 사람의 1%가 숨겨진 99%의 진심을 폭로한다면
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효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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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의 문체는 매력적이고 재미있지만 친절하진 않다.

천천히 읽어도 봤으나 해석은 쉽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총체적 비평보다는 부분에 치중하다보니 전체를 알지 못하는 나에겐 순전히 코끼리 다리 만지기였다.  훌륭한 비평가의 평론을 사전지식 없이 읽는 느낌이었다.  그런 책을 읽을 땐 분명한 한계를 느낀다.  한시라도 한눈을 팔면 어디로 뛸지 모르는 생각의 전환이 읽는 이를 혼돈에 빠트린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튀어나오는 것도 거슬렸다.  어쩌겠는가?  나의 무식함을 탓할 수밖에.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이 불쑥 튀어나올 때는 꾸뻑꾸뻑하던 내 두 눈과 뇌가 즐거워지는 걸 느낀다.  책 읽기의 즐거움이란 바로,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이렇게 다르구나. 또는 이만큼 닮았구나의 차이로 판가름되는 듯하다. 




전사한 아들을 찾아다니는 러드어드 키플링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의 사고와 언어, 행동에  얼마나 갇혀 사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겨우 열여덟 살이었던 아들 존 키플링은 아버지 러드어드 키플링의 언어 속에서 선택할 수 없는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전장 속으로 뛰어든다.  아들이 죽은 후에야 아들을 찾아나서는 키플링의 고뇌가 마음 아팠다. 




현대 포토저널리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 사진기자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접이식 의자는 예술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반성하게 한다.  깐에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깜쭉거린 한때가 있었고 내 삶에게 사진은 아직도 유효하게 남아있다.  훌륭한 작가를 만날 때면 사진을 대하는 그들의 철학이 궁금해지곤 했다.  한 가지 색깔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전환점은 없었는지 시행착오는 어떻게 인정하며 변화시켰는지가 엉뚱하게도 더 궁금했다.  자연광 아래서 포착한 찰나의 순간을 찍었다는 앙리의 주머니에는 평생 남의 눈에 뜨지 않는 소형 3.5mm 카메라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갤러리에서는 접이식 의자를 앞에 놓고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바라본다.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시간은 그에게 유효하지 않다.  다만 그의 마음을 타고 들어오는 순간의 영감만이 그 안에 존재한 것이다.  뭔가를 오래 응시해본 이는 알 것이다.  찰라의 순간에 파고 들어오는 그 환희의 순간을. 




다이애나의 결혼식 장면은 기대보다 지루했다.  아마도 나는 스캔들이 더 궁금했었나보다. 




피카소의 그랑조귀스탱가 7번지는 ‘디테일’의 언급부분에서 공감이 많이 갔다. 영화 <블루>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과연 나는 그 몇 명만이 느꼈다는 그 미세한 디테일을 간파했을까?  그리고 내 삶의 결정적 순간에 보여 지는 디테일을 어떤 시선으로 받아들였나...., 아마도 오랜 동안 내 뇌리에서 지워지기 힘든 부분이 될 듯한 운명적 예감이라고나 할까?  그랬다.




시계를 풀어놓은 파울 첼란..., 가장 재미있었고 가장 마음 아팠다.  파울 첼란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가치 있는 책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계 독일인 시인.  2차 세계대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나왔지만 평생을 죄의식에서 살아야했던 시인. 




읽는 내내 그 1%에서 99%를 얻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치 없는 일은 분명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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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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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신비한 마력을 지녔다.  니은이가 왕고래집 할머니의 글 ‘내가 화날 때’라는 글을 읽으면서부터 몸속에 있었던 화들이 분출되기 시작한다.   좋은 책을 읽고 난 후엔 책표지를 따뜻한 손으로 쓰윽 쓸어 보는 게 내 버릇이다.  내 손끝으로 따뜻한 기운들이 온 몸으로 퍼지는 그 기분이란..., 한 권을 책을 읽은 후의 감동은 그렇게 손끝을 타고 온다.   흰수염고래와 뽀글뽀글 올라오는 물방울들..., 바다가 느껴졌다.  고래가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피운다는 꽃분수가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몸에도 마지막 순간 피우고 싶은 꽃이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이 따스한 기운들은 분명 신비한 마력임에 틀림없다.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우는 왕고래집 할머니는 이런 말도 한다.




“글을 쓰다보니 마음이 이상해지더라. 그냥 글자만 쓰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라. 마음을 깊이 뒤집어 밭을 가는 것도 같고, 맘속에서 찌개를 끓이는 것도 같고.”




글을 쓴다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 동안 심리소설을 많이 써온 저자의 책들은 따뜻하기 보다는 사실적이었고 분석적이었다.  나름 저자의 책들을 즐겨 읽었던 나에게 이 책은 그 동안의 느낌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그녀가 조금 부족했던 부분들이 이 책에서는 두드러졌다.  교감과 소통과 따뜻함, 그리고 성장.  이 모든 것들이 상생하는 느낌이었다.  




니은이는 열일곱에 부모를 잃었다.  열입곱이라는 나이는 부모가 필요함에도 부모가 필요없다고 느끼는 나이다.  존재가 곁에 있으면서 내가 조금씩 떠남을 준비하는 것과 아무런 준비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것은 다르다.  “세상 모든 노래가 사랑노래이고 세상 모든 이야기가 사랑이야기라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세상 모든 노래는 이별노래고 세상 모든 이야기는 이별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 니은이는 아버지의 고향인 처용포에서 장포수할머니와 왕고래집 할머니를 통해 오래 사랑하는 법과 느긋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곤 날마다 눈앞이 조금씩 더 환해짐을 느낀다.  “십년 쯤 후에도 여전히 슬프다면 슬픔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인도를 여행하는 나무 사촌 언니처럼 하면 될 것이고, 이십년쯤 후에는 헤븐에서 만난 언니들처럼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이면 스트레스를 날려보낼 즐거운 일을 찾을 것이다.  삼십년쯤 후에는 왕고래집 아주머니처럼 유쾌하게 살면 되고, 더 시간이 흐르면 왕고래집 할머니처럼 늙어가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니은이는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일 년쯤  학교는 늦어지겠지만 니은이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처용포에서 배운다.




 나는 요즘 달콤한 초콜릿이 자꾸 땡긴다.  달콤한 것들이 좋아진다.  고래를 아주 오랜 동안 사랑한 장포수 할아버지,  늙을수록 어린 아이처럼 솔직해지는 왕고래집 할머니의 오랜 연륜.  그 안에서 품어져 나오는 따뜻함.  꼭 초콜릿 같다.  입안에서 퍼지는 기운이 뜨겁다.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자기 인생을 책임지며 살기 원하는 나무 사촌언니의 인생 표어들도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이렇게 살면서 당당해지고 싶다.  내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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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대로 살아라 - 자유 사용설명서
톰 디즈브로크 지음, 김영민 옮김 / 도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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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이름만으로도 몸에 공기가 차들어 오면서 하늘로 붕붕 떠오르는 느낌이다. 한용운이 아무리 ‘복종’이 더 좋다고 말해도 우리는 ‘자유’를 꿈꾼다.  준비나 계획 따윈 처박아두고 홀가분한 현실 도피적인 자유를 꿈꾼다면 이 책을 읽어봐야 가슴만 더 답답해질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한다면 우선 다이어리를 준비하라.  그리고 계획하고자 하는 일을 차근차근 적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원한다면 자신에 대한 로드맵을 확실히 세우라.  그래야만 자유의 문에 한 발 다가설 수 있다고 말한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 하인리히 뵐




연습도 해야 한다.   모든 상황에 대해 스스로 정리해야 되고 생각하고 배워야만 한다.  금지표지판도 만들어야하고 스스로에게 조언도 구해봐야 한다. 이 만큼 하다보면 이건 자유가 아니라 구속이다.  이런 구속을 이기지 못하면 자기운명에 개척은 있을 수 없으며 개척 없는 자유는 질 낮은 마이너스 인생이 되는 것이다.




이런류의 자기 계발서들이 그렇지만 옳은 말 투성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그 말이 다 그 말 같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음... 다이어리와 색연필을 준비 해야겠군. 그리고 내 생각을 열심히 써대야겠군.’ 하고 생각했지만 내 가방에서 다이어리는 항상 뒷전이다.  그러니 부담감이 더 커진다.  자유의 기본은 다이어리라는데 내 가방엔 그게 없으니 내 자신에 대한 로드맵은 언제나 그려질까?  그러면서 그 구속이 다시 버거워진다.  늘 상처는 건들수록 아픈 법이다.




목표를 세우되 구체적으로 세우란다.  나의 목표는 늘 추상적이다.  나의 못된 버릇을 지적해주는 책의 갈피갈피엔 내가 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내 삶의 목표가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언젠가는...., 이런 나는 언젠가는 죽겠구나 싶다. 




“아무리 느림보 중의 느림보라도 목표지점을 시야에서 놓치지만 않으면

 정처 없이 헤매는 느림보보다 언제나 빠를 수밖에 없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




책은 친절하게도 ‘자유를 위한 결정에 필요한 7단계’도 연습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시간을 확보해야 되고 아이디어 수집을 해야 하며 해결책을 하나씩 살펴보고 기록하며 예상결과를 검토하며 마음속 고정관념에 귀 기울여 최종 결정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늘 적극적인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도덕성에 반하여 결정한 선택권을 스스로 갖는 것도 중요하다.  때로는 이기적인 자만이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얘기다.  책임감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사회 통념 속에서 자책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고 충고한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만이 정말로 자유롭다 (폴커 슈톨츠) ”




나는 가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불안하다.  큰 집도 맘에 안 들고 큰 차도 맘에 안 든다.  그러면서 남의 탓을 한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큰 집도 큰 차도 내 옆에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남의 탓이 되는 것이다.  저것들이 내 정신과 육체의 자유를 구속시키는 구나. 라고 결정한다.  양질의 나를 위해 아껴둔 돈들이 쓸데없는 곳으로 흘러간 느낌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책은 나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변하기 어려운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유이고, 세상에 대한 요구와 기대, 소망을 놓아버리는 선택도 자유의 몫이다.” 내 불안이 나 스스로의 것일 수도 있겠으나 세상의 요구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뒤집어 생각해 봤다.  이제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꾸거나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받아들여야할 시점인 것이다. 




“소비를 억제하자거나 욕구를 절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감하게 가진 것을 포기하거나 아주 적은 돈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하더라도, 그런 삶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마음으로 갈망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선택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 톰 디즈브로크 - ”




거리낌 없는 선택을 위해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는 저자의 충고에 공감하며 이젠 다이어리를 우선순위에 두고 챙길 것이다. 알록달록한 색연필도 깎아 심지를 세울 것이다.  한 번 그려보고 싶다.  내 자유의 밑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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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정원의 철학
윤혜린 지음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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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은 베란다가 없었을 뿐더러 있을 필요도 없었다. 문만 열고 나오면 온 천지가 꽃밭이었고 식물원이었고 숲이었다. 산으로 둘러진 집 뒤로 온 천지가 놀이터였다. 너른 벌판에서 공놀이를 했고 벌판 아래 너럭바위에선 소꿉놀이를 했다. 하다가 지치면 너럭바위에 등을 대고 하늘을 보며 단잠에 빠지면 된다. 봄이면 진달래 숲에 숨어서 숨바꼭질을 하며 온 산을 누비고 다녔었다. 저녁때가 되면 온 동네가 밥 짓는 냄새와 솔잎 타는 냄새로 뿌옇게 살이 오른다. 엄마가 우리이름을 부르며 ‘밥먹어라’ 할 때까지 놀았다. 평상에 둘러앉아 방금 씻은 상추에 쑥갓을 탈탈 털어가며 된장에 싸먹으면....,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그러는 사이 하늘엔 별이 총총 떠있고 평상에 누워 부채로 달려드는 파리와 모기를 탁탁 쳐내며 가물가물 졸기도 했다.

  지금은 빌딩 숲 속에 산다. 다행히 이번에 이사 온 집 앞에는 작은 숲이 있다. 나는 늘 아침이고 저녁이고 그 숲을 바라보며 살지만 한 번도 그 숲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숲과 내가 한통속으로 있을 때와 멀리서 관망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바라만 보는 나에겐 아무런 추억이 없다. 숲과 나의 소통은 관념의 틀 속에서 서로가 일방적일 뿐이다. 올 여름엔 돗자리를 들고 그 숲에 가서 솔향기를 맡아야겠다. 가을엔 밤을 주우러 가야겠다. 겨울엔 비닐부대에 볏짚을 넣어 미끄럼을 타러가야겠다. 
 
  나에게도 오래된 화분들이 있다. 십년을 넘게 나와 함께 살면서 매해 꽃을 피워내는 풍란이 2개 있다. 6년 전부터 꽃을 피우는 호접란이 1개 있다. 승진했다고 축하한다며 친구들이 보내 준 산세베리아가 4년 넘게 잘 크고 있다. 방송국에서 보내 준 좀 작은 산세베리아가 새로운 식구로 자리 잡았다. 작년에 애기를 낳고 집에 돌아오니 동양난에 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돌보지 않고 보낸 여름이었는데 용케도 꽃을 피워서 나와 우리 아이들을 환영해 줬다. 참 고마웠다. 올 봄엔 풍란을 몇 개 더 사서 현무암 위에 틀을 마련해줬고 숯을 몇 개 쌓아서 그 위에 분양했다. 우리와 함께 한 3년을 보내면 꽃을 피울 것이다. 튜울립을 심었는데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시들시들 죽어갔다. 이런 화초가 나오면 엄마네 꽃밭에 심어 놓는다. 그러면 용케도 다음해에 싹을 틔운다. 땅심을 받는 것이다. 

  나는 가끔 베란다에 앉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이 화분들과 꽃을 보면서 내 유년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천지분간 못하고 천둥벌거숭이로 숲을 뛰어다니며 놀던 그 친구들. 그 친구들도 나만큼이나 그 시절이 그립고 아릴까? 베란다 정원의 철학을 읽으며 사람살이, 인생살이, 식물살이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큰 철학의 개념은 없다. 다만, 쉽게 잊혀지고 빨리 지나가는 것들을 조금 잡아두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어둑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동이 틀 때가 되니 어느 덧 마지막장을 덮고 있었다. 조금씩 깨어나는 숲과 동살에 빛을 발하는 풍란의 하얀 꽃을 보고 있자니 정말 평화로웠다. 

책 속엔 적어두고 싶을 만큼 좋은 구절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두 구절은 꼭 소개하고 싶다. 

"말로써 말 많은 세상에서 힘들게 일하다 돌아와 허허로운 베란다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나도 몰래 평화로운 느낌이 드는 이즈음이다.
사람이 열두 번 변한다는 말처럼 나는 이제 광합성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성싶다. p74

식물은 윗식물 아랫식물 할 것 없이 배설물이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방식대로 영양을 섭취하고 몸 안에서 에너지를 순환시키는데 그런데도 찌꺼기로 나오는 게 하나도 없다. 다들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다.” p99

광합성인간으로 새순처럼 순하게 살고 싶다. 더불어 자기 방식을 잃지 않는 독립심으로 순환의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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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2
이민진 지음, 이옥용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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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모임에서 아이들에게 성에 관한 그림책 선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이가 이런 질문을 뜬금없이 내놓았다.  아이들에게 성기를 얘기할 때 우리말인 ‘보지’, ‘자지’를 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순수한 우리말이 있음에도 음경(陰莖)이나 음문(陰門)등의 한자어를 쓰고 우리말은 왜 비속하다하여 터부시해야하는가가 질문자의 의견이었다.  우리는 언어의 발전과 변천까지 들먹이면서 대중적으로 비속하다하여 꺼리는 말은 아이들에게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같다 라는게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질문자의 의도에도 일리가 있기에 뒷맛은 영 개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교적 사회에 살면서 지나치게 성을 음지에 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말이 성에 관한 비속어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는 것이 아니냐는 말로 옮겨갔다.  점잖은 척하며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좋은 그림책에 대한 찬양(?)을 위한 모임이라서 그런지 ‘성’에 대한 담론은 그리 길게 꼬리를 물지 못했다. 




웬? 性이야기

이 책은 그동안 오래된 궤짝 같은 고리타분한 책들 속에 묻혀 있던 내게 나의 성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 표지부터가 도발적이다.  동양적인 듯하면서도 서양적 이미지가 풍부한 한 여성이 검은색 나이트드레스를 입고 붉은 색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독자를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다.  담배가 청소년에게 해롭다는 이유로 TV에서 담배광고는 물론 드라마에서 담배 피는 장면까지 심의에 걸려 삭제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감안할 때 역시 과감하다.  케이시의 독자적이며 자기 생각이 뚜렷한 자유로운 영혼과 함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이지적 모습이 담겨있다.




케이시는 미국의 한인 1.5세대이다.  이십대를 도전과 좌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케이시는 세탁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이민부모의 밑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나오지만 마땅한 취업도 하지 못하고 부모가 원하는 로스쿨에도 진학하지 않는다. 백인 남자친구인 제이와 동거하다가 은우와 결혼에 대한 확신 없는 동거를 하고 직장 동료인 휴와도 성관계를 갖는다.  제이를 만나기 이전에도 많은 남성을 만났으며 낙태하기도 했다.  그녀의 친구 엘라는 모든 면에서 모범생의 전형이지만 부와 출세에 대한 야망이 큰 남자와 결혼했다가 실패한다.  케이시의 어머니 리아는 소녀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근대 한국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자기감정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한 남자와의 성관계로 아이를 갖고 유산을 하게 된다.  갈등과 모순 속에서 그들은 진실하려고 노력한다.  누구도 비난받을 수 없다.  그것이 저자 이민진의 의도였지 싶다.  가장 솔직한 것이 가장 진실하며 그 진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을 준다.  그런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다소 이야기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느낌도 있었으나 그녀가 표현하는 한줄 한줄에 확실한 자기 정체성이 있었다.




나의 십대 그리고 이십대는 어떠했던가?   가난한 부모를 탓한 적은 없었다.   지방의 보잘 것 없는 대학이었지만 장학금이 없었다면 학위를 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다녔던 대학 4년은 내 인생에 아무 쓸모없는 졸업장만을 안겨주었다.  뚜렷이 내가 가야할 길도 막막하기만 했었다.  미봉책에 불과했던 내 인생은 지금도 투덜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그 투덜거림은 생활이라는 이름 속에서 아주 가끔으로 변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경제적 어려움은 해결했잖아!  그래도 이정도면 사회적 인정도 있고 안정적이잖아! 라며 위로하지만 아직도 내 가슴은 잉걸불처럼 꺼지지 않는 ‘꿈’이라는 것이 있어 먹먹하다.  그 꿈은 꿀 때마다 아프다.  꿈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 계획도 없다.  늘 갈증만 느낄 뿐이다.  케이시 한은 자신의 꿈을 찾아간다.  분명 또 다른 좌절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경제적이라든가 사회적 인정을 들먹이며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훌훌 벗어버린 성정체성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책은 나를 이해시키기보다 타인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때론, 나를 합리화시키기보다 남을 인정하는데 더 인색해지기 쉬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며 내 마음이기도 했다.  내 아이에게 좋은 그림책을 읽어주고 선물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 이해하는 마음으로 선택권을 양도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중요한 일이리라.  그런 의미에서도 케이시 한과 엘라 그리고 리아의 삶 속에 얽혀지는 갈등구조는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하는 좋은 모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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