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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정원의 철학
윤혜린 지음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4월
평점 :
내 어린 시절은 베란다가 없었을 뿐더러 있을 필요도 없었다. 문만 열고 나오면 온 천지가 꽃밭이었고 식물원이었고 숲이었다. 산으로 둘러진 집 뒤로 온 천지가 놀이터였다. 너른 벌판에서 공놀이를 했고 벌판 아래 너럭바위에선 소꿉놀이를 했다. 하다가 지치면 너럭바위에 등을 대고 하늘을 보며 단잠에 빠지면 된다. 봄이면 진달래 숲에 숨어서 숨바꼭질을 하며 온 산을 누비고 다녔었다. 저녁때가 되면 온 동네가 밥 짓는 냄새와 솔잎 타는 냄새로 뿌옇게 살이 오른다. 엄마가 우리이름을 부르며 ‘밥먹어라’ 할 때까지 놀았다. 평상에 둘러앉아 방금 씻은 상추에 쑥갓을 탈탈 털어가며 된장에 싸먹으면....,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인다. 그러는 사이 하늘엔 별이 총총 떠있고 평상에 누워 부채로 달려드는 파리와 모기를 탁탁 쳐내며 가물가물 졸기도 했다.
지금은 빌딩 숲 속에 산다. 다행히 이번에 이사 온 집 앞에는 작은 숲이 있다. 나는 늘 아침이고 저녁이고 그 숲을 바라보며 살지만 한 번도 그 숲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숲과 내가 한통속으로 있을 때와 멀리서 관망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바라만 보는 나에겐 아무런 추억이 없다. 숲과 나의 소통은 관념의 틀 속에서 서로가 일방적일 뿐이다. 올 여름엔 돗자리를 들고 그 숲에 가서 솔향기를 맡아야겠다. 가을엔 밤을 주우러 가야겠다. 겨울엔 비닐부대에 볏짚을 넣어 미끄럼을 타러가야겠다.
나에게도 오래된 화분들이 있다. 십년을 넘게 나와 함께 살면서 매해 꽃을 피워내는 풍란이 2개 있다. 6년 전부터 꽃을 피우는 호접란이 1개 있다. 승진했다고 축하한다며 친구들이 보내 준 산세베리아가 4년 넘게 잘 크고 있다. 방송국에서 보내 준 좀 작은 산세베리아가 새로운 식구로 자리 잡았다. 작년에 애기를 낳고 집에 돌아오니 동양난에 꽃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돌보지 않고 보낸 여름이었는데 용케도 꽃을 피워서 나와 우리 아이들을 환영해 줬다. 참 고마웠다. 올 봄엔 풍란을 몇 개 더 사서 현무암 위에 틀을 마련해줬고 숯을 몇 개 쌓아서 그 위에 분양했다. 우리와 함께 한 3년을 보내면 꽃을 피울 것이다. 튜울립을 심었는데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시들시들 죽어갔다. 이런 화초가 나오면 엄마네 꽃밭에 심어 놓는다. 그러면 용케도 다음해에 싹을 틔운다. 땅심을 받는 것이다.
나는 가끔 베란다에 앉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이 화분들과 꽃을 보면서 내 유년의 친구들을 생각한다. 천지분간 못하고 천둥벌거숭이로 숲을 뛰어다니며 놀던 그 친구들. 그 친구들도 나만큼이나 그 시절이 그립고 아릴까? 베란다 정원의 철학을 읽으며 사람살이, 인생살이, 식물살이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큰 철학의 개념은 없다. 다만, 쉽게 잊혀지고 빨리 지나가는 것들을 조금 잡아두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어둑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동이 틀 때가 되니 어느 덧 마지막장을 덮고 있었다. 조금씩 깨어나는 숲과 동살에 빛을 발하는 풍란의 하얀 꽃을 보고 있자니 정말 평화로웠다.
책 속엔 적어두고 싶을 만큼 좋은 구절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두 구절은 꼭 소개하고 싶다.
"말로써 말 많은 세상에서 힘들게 일하다 돌아와 허허로운 베란다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나도 몰래 평화로운 느낌이 드는 이즈음이다.
사람이 열두 번 변한다는 말처럼 나는 이제 광합성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성싶다. p74
식물은 윗식물 아랫식물 할 것 없이 배설물이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방식대로 영양을 섭취하고 몸 안에서 에너지를 순환시키는데 그런데도 찌꺼기로 나오는 게 하나도 없다. 다들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다.” p99
광합성인간으로 새순처럼 순하게 살고 싶다. 더불어 자기 방식을 잃지 않는 독립심으로 순환의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