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4
이철수 지음 / 삼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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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절 초입의 찻집으로 저물녘의 긴 햇살이 따스하게 찻잔을 비추던 날이었다.

아마도 배꽃이 지던 늦은 봄쯤이었을 거다. 하얀 모시천에 까맣게 흩어지는 것이 별 빛 같기도 하고 긴 밤에 뿌려지는 봄비 같기도 했다. 그것은 하얗게 지는 배꽃이었다. 저렇게 작은 그림 속에 온갖 이야기가 쏟아지는 느낌. 그래서 나는 그 절집을 나오는 길에 그 하얀 보자기를 두고올수 없어 가슴에 품고 나왔다. 지금도 내 테이블에는 그날의 기억이 고이 간직된 채로 ‘배꽃 하얗게 지던 밤에’ 풍경이 있다.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창호지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그리운 사람 그리워하며 밤을 지새우던 날. 동살이 비취기 시작하는 어스름 녘에 뒤안 문을 열어보니 비에 젖은 배꽃이 장독대 위에 곱게도 내려 앉아 있었다. 그 하얀 배꽃이 어찌나 내 맘 같던지 눈물 흘리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다. 지금은 생각만으로도 따뜻한 기억이다. 철수님의 책을 읽다보면 잊혀졌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유배되듯 발령 났던 변방의 사업소에서 점심밥을 먹고 산책 다녔던 마을길에 탱자꽃과 역원이 한 명 뿐이었던 시골 간이역의 측백나무 그늘 밑 낡은 나무 벤치. 낮은 기와담장 밑으로 피어났던 사랑초와 상사화...., 그 꽃 깊이 보고 싶어 기척도 없이 대문을 넘었던 오롯이 나만 있었던 감성들. 그 누구도 철없는 나를 훔쳐보지 않았고 그래서 행동이 더 자유스러웠던 기억. 철수님의 그림들이 내 기억을 수 놓는다. 돌이켜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 변방에서의 삶이. 그런데 나는 왜 다시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걸까? 늘 선택은 나에게 주어지는 것임에도,

 

지금은 충북 제천 외곽의 농촌에서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판화작업을 하고 있단다. 자연 속에서 사는 그의 사계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서 아주 천천히 읽었다. 토시하나 버릴 것 없는 마음의 길이 느껴졌다. 자연 속에 다 있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도, 너그럽게 바라볼 줄 아는 넉넉함도, 작고 초라해도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사람이 만든 세상이니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 흔들리지 않는 둥치로 커나간다는 것, 온통 봄햇살 같은 사람, 그 곁에 있고 싶다는 것. 내 마음까지 온통 붉게 만드는 시 같은 그림과 그림 같은 이야기들. 짧아서 더 귀하게 와 닿는 잔잔한 미소 같은 글귀들. 많은 위로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철수님. 덕분에 맘속이 시원해졌고 ‘미풍에도 가지 끝이 흔들리는 여리고 무성한 잎 같아서’ 늘 걱정이었는데 이 또한 긍정해 주니, 감사합니다. ‘관록의 둥치’를 알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제 욕심의 늪에 불꽃을 빠뜨려 스스로 자진하는 욕심의 운명을 지닌 살찐 초’로 살지 말자 하시니, ‘얼핏 아름답고 솔깃하지만 핏기는 없는 관념의 언어들’ 버리게 하시니, ‘가난의 의미가 선택이고 결단이 되길’ 바라는 그 마음 알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바깥기운에 끄달리지 않고 살기 위해 노력하며 판단의 기준이 ‘우리들’이 되도록 노력하겠으며, 저를 온통 긍정하느라 붉디붉은 저 꽃색 처럼 살고자...., 그렇게 오는 봄을 맞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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