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

 

나도 감옥 같은 방에 앉아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내 마음을 다 주지 않았고 내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살 만큼만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이 스무 살의 상징처럼 때론, 청춘남녀의 눈 먼 불장난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늘 사랑에 서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동료에 대한 사랑이 그렇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렇다. 상처받지 않을 일들을 먼저 생각했고 나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으로 인하여 분명 배신 받게 될 내 여린 가슴한구튕이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내 것을 다 비우고 내 것을 다 주지 않으면 결코 채워지지도 받지도 못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늘도 서툰 내 자아본능만이 나를 지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깨진 뒤웅박이 된 뒤에야 뼈아픈 후회를 한다. 사랑했던 모든 자리마다 폐허가 되었다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이젠 아무도 기다리지 않으며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인 그 자리. 뼈아픈 후회만이 남는 것이다. (황지우의 뼈아픈 우회 인용)

 

죽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지나간 사랑을 질질 끌고 다니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나를 보호하겠다는 이유하나 만으로 오지도 않은 상처를 걱정하며 지금의 사랑을 유보하진 말아야겠다. 누군가에게서 느껴지는 그 건조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시들 말라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유죄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동료와 친구에게 그리고 나를 품고 있는 익명의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짓기 때문이다.

 

이 책을 같이 읽은 선배가 말했다.

“이 책 서평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왜? 어려웠어.”

“아니, 할 말이 너무 많어.”

알 것 같다. 그 말의 의미를.

책이 참 예쁘고 작가의 그 마음이 참 예쁘다. 맨 앞장의 전문을 다 옮기는 것이 예의이겠으나 조금 추렸다. 단 두줄이나 석줄로 이해될 말이 아니어서 장문을 옮겼다. 좀 빼볼까도 생각했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감성의 울림이 깊은 드라마작가로 유명한 저자의 드라마들을 즐겨봤다. 그의 극본에는 빨려 들어가게 하는 강한 끌림이 있다. <꽃보다 아름다워>가 그랬고 <고독>이 그랬으며 <거짓말>이 그랬다.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을 사건들을 따뜻하게 보듬는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쓸 수 없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해받고, 사랑받고, 아름다울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그 따뜻한 마음이 그의 드라마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거였다. 그 보편성에 기대본다. 이해받고, 사랑받고, 아름다울 자격이 있는 것. 그것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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