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신비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조규홍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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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 

가톨릭 출판사 북클럽 3,4월의 도서는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의 죽음의 신비입니다.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하면 자동 연상으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가 떠오르고,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하면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가 생각납니다. 슈파이어는 현대 가톨릭 신학의 거장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평생에 걸쳐 신학적 영감을 주고받은 인물이라서 두 사람은 각자를 소개할 때에 꼭 서로를 언급하는 것을 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듯 가톨릭 출판사에서도 발타사르의 책이 나오면 슈파이어의 책이 나오고 마치 한 벌의 세트처럼 접하게 되곤 합니다. 많이 듣던 이야기라 하고 읽다가 문득! 2024년 2월에 나왔던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가 떠올랐습니다. 어느새 가톨릭 출판사 서평 경력직... ㅋ 


발타사르의 신학적 체계 곁에는 언제나 슈파이어의 직관적이고 관상적인 목소리가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유는 한 뿌리에서 나온 줄기처럼 닮아 있지만 그 끝은 미묘하게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완전 다르지는 않구요, 결이 거의 비슷합니다. 발타사르가 죽음을 통해 인간이 그리스도적 사랑 안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자기 초월'의 드라마를 보여주었다면, 슈파이어는 죽음의 모든 과정을 하느님께 기꺼이 내어드리는 '순명'을 통해 그분의 신비에 참여하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자리를 조명합니다. 발타사르에게 죽음이 자아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초월의 통로라면, 슈파이어에게 죽음은 가장 깊은 순명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자신을 봉헌하는 사명의 자리가 됩니다. 이들의 깊은 시선을 길잡이 삼아 죽음과 생명의 신비를 풀어 봅니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인간은 죽음 앞에서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무력함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평생동안 붙잡고 있던 욕심과 집착, 그리고 아집이 비로소 내려놓아지는 순간입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는 빈자리에서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과 가장 가까워집니다. 끝이라고만 여겼던 그 지점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문이 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며 지금이라는 짧은 순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지키려 애쓰지만, 죽음은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손에 쥐었던 것들과 소중히 여겼던 인연들, 나를 증명해 주던 생각들까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이 넘기 어려운 마지막 문턱인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깊은 질문이 됩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종말이 아닙니다.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리는 능동적인 과정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서두르거나 갈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살아있는 동안 내려놓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소중한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삶과 수난은 죽음이 가진 이 비극적인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나 허무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 이어지는 새로운 길로 이해됩니다. 제아무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해도, 죽음이라는 문턱은 결국 우리를 다시 그분 앞에 세워 놓습니다. 사람은 때로 하느님을 외면하며 살아가지만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다시 그분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어지는 마지막 자리입니다. 우리가 가장 약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과의 관계는 오히려 가장 깊어집니다.


육신의 죽음 너머에 펼쳐질 구체적인 모습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떠나는 이의 몸을 볼 수 있을 뿐 그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우리는 이를 삶과 기도 안에서 조용히 받아들입니다. 죽음은 단순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초대이며, 영원을 향해 비밀스럽게 열린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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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알아야 할 사회교리 Q&A - 여러분의 이웃은 하느님이십니다
미헬 레메리 지음, 최정훈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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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사회탐구 강사 이지영과 아나운서 김대호가 함께 출연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였던 가난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이지영은 사회적 책임과 연대를 강조했고, 김대호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리듬을 지키는 자유를 이야기했습니다. 성취와 연대, 혹은 자유와 휴식. 상반되어 보이는 이 가치들은 사실 오늘의 청년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동시에 붙들고 씨름하는 생존 전략이자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그 지점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가톨릭출판사의 『청년이 알아야 할 사회교리 Q&A』를 떠올렸습니다. 마침 서평을 준비하며 읽고 있던 책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 역시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사회교리를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청년들의 고민 안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함께 풀어가는 책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이 언제나 옳은가?”, “정의와 평화는 현실에서 가능한가?”와 같은 물음은 결코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 한가운데에 놓인 질문입니다.


정순택 대주교는 추천사에서 우리가 궁금해하면서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던 다양한 사회적 주제들을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시의성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책은 사회교리를 추상적인 개념이나 문헌 요약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바탕으로 가난과 연대, 노동과 경제, 정치와 국가, 기술과 생명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영역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이끕니다.


특히 정치 참여를 그리스도인의 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설명하면서도, 특정 이념의 틀에 갇히기보다 하느님의 법과 공동선에 부합하는지를 양심 안에서 성찰하라고 조언합니다. 인공지능 기술 역시 인간을 소외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노동을 돕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베네딕토 16세가 강조했듯 신앙은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안에서 책임 있는 선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주민의 삶을 사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낯선 이를 환대하는 태도, 그리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피조물을 연결된 이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그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생산 과정과 노동 환경을 돌아보는 작은 관심 역시 사회교리가 말하는 살아 있는 신앙의 실천일 것입니다.


‘혼자 잘 사는 것과 함께 잘 사는 것은 정말 다른 길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해 두 길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과 공동선을 향한 책임은 서로를 약화시키는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단단하게 합니다. 영상 속 두 사람이 보여준 서로 다른 태도 역시 이 두 축 위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청년이 알아야 할 사회교리 Q&A』는 사회교리를 완성된 정답이 아니라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의 이웃은 하느님입니다!”라는 선언처럼, 나를 존중하는 일이 타인을 향한 배려로 이어질 때 우리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깊이 성찰하며 세상 속에서 길을 찾고 싶은 청년들에게, 이 책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든든한 대화 상대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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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복론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김의태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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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마음에 내린 하느님의 처방전 한동안 마음이 참 메말라 있었습니다. 해야 할 일들에 파묻혀 숨 가쁘게 지내다 보니 감사라는 감정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았고, 일상은 무채색처럼 건조하기만 했었습니다. 특히나 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데 주변에서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더 많은 짐을 제 어깨에 얹어주려 했습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 끙끙대며 버티던 어느 날, 먼 곳의 성지에서 처음 뵙는 신부님께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봉사는 내가 시간 남을 때, 여유가 될 때 하는 것이라며 내려놓으라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해 주신 해결책이 참 현실성이 없다 싶기도 했지만, 그 말씀에 기대어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생긴 여유 시간에 잠도 좀 푹 자보고 운동도 하면서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몸과 마음을 억지로 깨우지 않고 가만히 두었더니, 신기하게도 아주 작은 일상들이 하나둘씩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추운 날씨에 머물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있다는 게 참 감사했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 남편과 아이들이랑 보내는 소소한 일상들이 새삼 즐겁고 소중해졌습니다. 저와 함께 웃어줄 이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멀리서 동네로 놀러 오는 동료를 제가 마중 나가야 할 판에, 굳이 우리 집 앞까지 와서 저를 차에 태워 가는 배려를 받을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심지어 키가 아주 크지 않아 코트가 발목까지 내려오니 따뜻해서 참 좋더라구요. 만약 내 키가 170이었다면 이 추운 날에 발목이 얼마나 시렸을까 생각하니 지금 제 모습이 좋아서 뜬금없이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별거 아닌 일들에도 서서히 기쁨이 차오르는 걸 경험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복론을 읽으니, 마음이 왜 이렇게 막 행복해지는 걸까요. 교황님께서는 행복이란 어디선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이라는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그 안에 이미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해지려고 무언가를 더 채우거나 억지로 애쓰기보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말씀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나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여유를 가지라는 말씀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무언가를 해내야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을 때도 그분은 이미 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을 먼저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쉬고 그분께 받은 사랑을 확인할 때, 그 기쁨은 억지로 짜내는 의무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이 됨을 느낍니다. 하느님께 생명을 거저 받았듯이 나 또한 그 무상함을 살아갈 때, 즉 나를 아끼는 마음이 타인을 향한 진실한 나눔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으려 노력하고 낙엽보다 새로 돋아나는 싹을 지켜보는 희망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거운 짐에 눌려 근근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다정한 말씀들은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려두신 선한 꿈을 향해 이제는 기쁘게 걸어가 보려 합니다. 그 길 위에서 평범한 물이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하듯, 나의 매일매일이 기적 같은 은총으로 가득하기를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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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제자들이 사용한 그리스어 낱말 ㅣ 하느님의 알파벳 2
잔프랑코 라바시 지음, 박요한 옮김 / 생활성서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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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생활성서사에서 아주 흥미로운 책이 나와서 서평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알파벳이라는 시리즈로 『예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 낱말』과 『예수님 제자들이 사용한 그리스어 낱말』 중에 저는 『예수님 제자들이 사용한 그리스어 낱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서문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된 결과’로만 읽어 온 독자들에게, 그 이면에 놓인 원래의 언어와 사유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고 초대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오랫동안 성경을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두 단계로 나누어 가르쳐 온 저자 잔 프랑코 라바시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라는 두 성경 언어가 지닌 고유한 울림과 신학적 깊이가 번역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희미해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그 상실을 지적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원문이 지닌 생생한 색채를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되돌려 주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길은 학문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언어 교재라기보다, 성경의 핵심 어휘를 통해 하느님의 계시가 형성되는 방식을 체험하도록 이끄는 신앙의 여정에 가깝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수십만 개의 단어 가운데 신앙의 구조를 떠받치는 소수의 히브리어 어휘들을 선별하여, 그 소리와 어원, 의미의 층위를 따라가며 설명합니다. 이 단어들은 예수님께서 회당과 성전에서 들으시고 익히셨으며, 당신의 말씀과 행동 안에서 반복해 사용하신 언어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 예수님의 언어 감각과 사고 방식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됩니다.

 책에서 알려주고 있는 50여개의 그리스어 어휘 중 저는 두 개의 단어를 예시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히브리어 셰마(שמע)와 그리스어 아쿠오(ἀκούω), 곧 ‘듣다’라는 동사에 대한 설명에서 잘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듣다’는 단순한 청각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하는 셰마 이스라엘은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삶 전체를 내어 맡기는 순종의 고백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ἀκούω 아쿠오 또한 같은 의미를 지니며, 바오로 사도가 말한 ‘믿음의 순종’과 깊이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고 선언하신 것처럼, 성경의 ‘들음’은 언제나 실천과 헌신으로 이어지는 행위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언어적 배경을 통해, 신앙이 단순히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 응답하는 태도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그리스어 여정은 복음서 저자들과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언어를 통해 신약 성경의 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중에서도 기노스코(γινώσκω), 곧 ‘알다’라는 동사는 성경적 앎의 깊이를 잘 드러내는 예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요셉이 마리아를 “알지 않았다” 고 표현할 때, 이 ‘앎’은 단순한 지적 인식을 넘어 사랑과 친교, 인격적 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란 참하느님을 알고,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이는 추상적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친교를 뜻합니다. 요한 서간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단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성경의 핵심 어휘들을 통해, 신앙의 ‘앎’이 이해와 실천, 고백과 순종을 아우르는 총체적 행위임을 일관되게 보여 줍니다. 동시에 저자는 신앙을 순수한 지적 체계로 축소하려는 영지주의적 위험과, 반대로 윤리적 실천으로만 환원하려는 도덕주의적 경향 모두를 경계합니다. 성경의 언어는 이 두 극단을 넘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이 그 계시에 응답하는 살아 있는 관계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완전한 이해를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 언어에 대한 공부가 지적인 취미나 기술 습득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50여 개의 단어를 통해 접근해봤지만 원어로 성경을 바라보는 일은 하느님의 계시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돌봄과 관심의 여정이라 기대하며, 신앙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들어 줄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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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김수환 - 김수환 추기경 회고록
김수환 구술, 재단법인 가톨릭평화방송 엮음, 조한건 감수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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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가톨릭출판사 2025년 북클럽 3기의 마지막 서평책은 『추기경, 김수환』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시복 추진이 본격화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때마침 가톨릭 출판사에서 하느님의 종 김수환 추기경님의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이번 김수환 추기경님의 회고록을 통해 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사제로 기억되는 이유를 이번 더욱 또렷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다가, 뭉클해졌다가, 재미있었습니다. 강추!
추기경님은 한국 현대사를 겪은 세대셨는데요, 일제강점기의 어린 시절, 한국전쟁과 군사정권, 유신 체제, 서울의 봄을 지나 지금의 민주사회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흔들릴 때마다 추기경님은 늘 가장 아픈 곳을 향해 마음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상처 난 이들을 살피고 위로하려 했던 한 사제의 마음을 회고록 곳곳에서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할아버지 김요안공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고, 당시 임신 중이던 할머니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추기경님의 아버님 김영섭 요셉이십니다. 가난한 옹기장수였던 아버님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님은 홀로 여덟 남매를 키우며 “너희 둘은 사제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며 세살 위 형인 김동환 가를로 신부와 함께 어린 김수환을 소신학교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소신학교 생활은 어린 김수환에게 그리 즐겁지 않았습니다. 소신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처럼 옹기장수로 살다가 스물다섯 즈음에는 장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저는 사제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자신은 사제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던 분이 결국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제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회고록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짝사랑’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갔습니다. 첫 마산교구장으로 지내다 서울대교구장으로 떠나던 날, 추기경님은 서운함에 눈물이 났는데 여러 해 함께했던 마산교구 사제들은 한 사람도 울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추기경님은 자신의 사랑을 담담히 ‘짝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이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으며, 마음이 향하는 곳이라면 기꺼이 책임 있게 사랑하는 것이 사제의 길이라는 깨달음이 그 고백 안에 담겨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 ‘짝사랑’은 더 넓은 자리에서도 이어집니다. 언젠가 남북이 함께 미사를 드릴 날을 바라보며, 통일 후 평양교구를 위해 기금을 모았던 마음을 추기경님은 다시 ‘짝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고백을 따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사랑이 떠오릅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싶은 저를 예수님은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멀찍이 서 있는 저를 탓하기보다, 조용히 곁을 지켜주십니다. 추기경님이 말한 짝사랑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사랑 같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응답이 없어도 마음을 거두지 않고, 그저 함께 있으려는 사랑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 제가 드리는 사랑은 늘 부족하고 서툽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마치 짝사랑하듯 저를 기다리십니다. 제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도, 응답이 더디더라도 마음을 거두지 않으시는… 예수님 그런 사랑이시죠? ^^
추기경님의 고백을 읽다 보면, 그분의 품위는 완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낮추고 부족함을 인정했던 태도에서 나왔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었으나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일에 나는 아직도 부족합니다”라고 솔직히 말하는 모습이야말로 추기경님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이 회고록은 하느님 앞에서 꾸밈없이 살아가려 했던 한 인간의 진실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회고록을 통해 인간의 따뜻함과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본명이 스테파노이신걸 저만 이제 알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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