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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평점 :
자신의 죄를 고한다. 간단하면서 쉬울 것처럼 느껴져도 막상 해보라고 하면 다들 꺼려하는 게 현실이다. 처벌받는다,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같은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가장 두려워 하는 게 있다면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다른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이런 죄책감을 강하게 느낄 정도로 피해자가 많은 범죄가 있다면, 살인사건 보다는 현대인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고 다양한 형태로 경험한 사기가 아닐까 한다.
이번 행복한 탐정 시리즈 3번째, 스기무라 사부로의 3번째 사건에서 미야베 미유키가 말하는 악이 전염된다는 것은 정말 두고두고 생각해 볼 점이었다.
대기업 사장의 딸과 결혼해 그룹 홍보지를 출판하는 부서에 들어온지 벌써 10년 가까이 된 스기무라 사부로. 이번 취재는 소노다 편집장과 함께 기업 내 재무관리 일을 했던 모리 씨를 인터뷰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끝낸 후, 스기무라와 편집장은 버스를 타고 귀가 길에 오른다. 그런데 버스가 잠시 정차하고 있을 즘, 타고 있던 한 노인이 권총을 꺼내들고 승객과 기사를 위협하는데...
사기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라 작중에서 나온 사건만 봐도, 국내의 다단계 사기라던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떳다방, 출처가 불분명한 방문판매 같은 게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런데 살인사건도 아닌 범죄가 이렇게 파급력이 큰 양상을 나타낼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사기라는 걸 왜 당하는지 이해를 못한 건 사실이다. 속는 사람이 정말 순진한 것이라는 생각 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상은 흔히 말하는 그 말빨이라는 것에 기술이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이 말빨 기술자들의 행보와 다단계의 구조를 보면서, 평범한 사람이 말기술로 순식간에 비밀결사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만큼 말의 힘은 대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사기 사건에 대한 생각하지도 못한 맹점을 알게 되었다. 주로 다단계 같은 사기를 보면 맨 꼭대기의 머리를 우선으로 해서 체포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밑의 주모자들도 같이 사기를 친 인물이다. 문제는 그들은 꼭대기의 원흉과는 달리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애매모호한 위치라 고통의 연속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분명 같이 사기를 쳤긴 하나, 사기 친 이들과 마찬가지로 속은 입장이다. 이게 바로 악의 전염과 그 폐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사건수사 부분을 보면 스기무라 사부로는 여느 탐정 캐릭터들과 달리 정말 현실적인 인물이다. 일종의 탐정들이 가진 기본인 특수한 연줄도 없고, 괴짜스러운 천재도 아니다. 그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을 더없이 소중히 여기는 순정남 같은 이미지에 우리나라 막장드라마에서 볼법한 평범한 과거를 가진 재벌가 사위다.
그래서 그의 수사법 또한 현실적이다. 주위에서 흔히 하고도 남는 방법이라 시시하다고 여길 법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셜록 홈즈 때는 부족한 기술이나 정보조사 실력을 괴짜스러운 천재 두뇌로 커버했지만, 지금은 그걸 전부 커버할 정도로 세상이 발전했다. 그러니 시시하다고 여겨야 되는 건 현실적인 탐정의 모습보다는, 사람의 천재성이 무색하게 보일 정도로 지독스럽게 발전한 세상일 것이다.
비록 법정으로 따지면 형사사건이 아닌 민사사건 범주에 드는 사건이었지만, 여러모로 죄를 참회한다는 것과 앞서 언급한 악의 전염 같은 문제점들을 생각하게 했다. 사기, 특히 다단계 같은 사기는 타인에게 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이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그럼으로서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잃고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무너지고 만다. 거기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인 돈 문제가 겹친다. 인간관계는 어떤 방법으로든 회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돈은 성격이 다르다. 갈수록 한 푼도 제대로 벌기 어려워지는 현실에 한 명도 아닌 수 많은 이들의 돈을 물어줘야 한다니.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분명 행복한 탐정이라고는 했는데, 이번 사건에서 스기무라 사부로는 잃은 게 너무나 많아 보였다. 오히려 불행이란 불행은 전부 떠 앉은 것 같다고 보일 정도다. 사기라는 주제 만큼 스기무라 사부로도 직접적인 폭력이 아닌 말(소문, 험담, 거짓말, 협박, 고함, 회유)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는데, 직접적인 폭력보다 언어적인 폭력이 더욱 큰 피해를 준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게 가장 큰 의미로 느껴졌다.
이번 사건 이후로 한층 성장한 스기무라 사부로를 기대해본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기를.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상하 관계 속에서는 작은 권력을 쥔 아주 약간 더 상위의 인간이, 거기에 어울리는 능력도 자격도 없는데 하위의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완전히 쥐고 말 때가 있지. 나는 그게 싫네. 내가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게 그거야. -384p
사람은 개조할 수 없어. 개조할 수 있는 건 '물건'일세. -395p
그런 조직이 적발되었을 때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꼭대기에 있는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죄를 묻는다는 걸.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자신들도 가해자라는 자각이 없는 사람들이 남아버리거든요. 그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690p
돈이라는 저주다 -775p
익명의 정보의 거대한 집적장인 인터넷 사회에서는 상식인 열 명의 발언을 단 한 명의 선동자가 쉽게 없애 버릴 수 있다 -7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