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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ㅣ 일본환상문학선집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7년 9월
평점 :
우리나라와 가까운 일본은 오래 전부터 각종 소설 장르를 접해왔다. 에도가와 란포를 시작으로 추리장르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 예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추리로 유명한 에도가와 란포는 생각보다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특히 후기 작품군으로 갈 수록 괴기, 환상적인 색체가 강해진 걸로 알려진다. 그런데 지금의 평가와는 다르게 과거에는 이 괴기, 환상 소설 쪽이 더 인기 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이길래 그렇게 유명했을까?
에도가와 란포의 환상 소설은 대체로 당시 서양문명과 일본 전통적인 요소가 결합된 형태로 보인다. 동양 특유의 미신적인 요소가 신기하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서양문명은 신기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면 란포가 만들어낸 소설 속 환상은 이렇다는 생각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 또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실존하게 만들 수 있는 세상이라고. 이런 느낌이 란포가 살던 시대에 어느 정도 공감과 함께 색다른 충격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추리의 거장이 쓴 환상 소설이라 그런지 곳곳에서 약간의 추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물론 환상소설답게 범인이 누구인가가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압화와 여행하는 남자
나는 우오즈에서 신기루를 보고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환상적인 일을 겪는다. 동승객인 어떤 노인이 가진 기이한 그림을 보게 되고, 그 노인의 형에 대한 얘기를 듣는데...
그림은 오래전 부터 환상소설에 소재로 유명하다. 때로는 무서운 것으로, 때로는 환상적인 것으로. 서양권은 물론이고, 동양권 각지에도 비슷한 얘기가 많아 옛날부터 그림은 여러모로 예술작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흔한 소재이긴 하지만 압화가 어떤 형태의 그림인지 보고서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림은 화법과 재료에 따라 느낌이 다른 만큼, 소설 속에서도 그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와 내용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시점이 꽤 과거다 보니, 서구식으로 변모하는 세상과 서양 문물에 대한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분위기였다. 우리에게는 흔한 것들이 과거 사람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는지, 자연의 경이로움과 미신으로 그것들을 해석하는 모습이 현존하는 환상 세계 같아 보였다.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
나는 탐정소설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 자주가던 우에노의 동물원에서 누추한 차림의 청년과 만난다. 그 청년은 흉내의 무서운 점을 강조하며 거울처럼 똑같은 쌍둥이 빌딩에서 벌어진 기이한 자살 사건 얘기를 들려주는데...
제목만 보면 추리단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환상적이면서 어딘지 모르게 소름끼치는 내용이다. 환상과 범죄가 한끗 차이로 나누어지는 점이 이 단편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도시를 숲처럼 묘사하는 부분에서 묘하게 무섭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시를 건물의 숲이라 하는 묘사는 많이 봤어도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보인다고 확실하게 나타내는 걸 보니 상당히 기괴한 느낌이다. 자연과 문명의 차이점을 특정한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사실도 또 다르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현실성만 놓고 보면 개연성 없는 일이겠지만, 이건 엄연히 환상소설이다. 환상 세계에서의 범죄 추적은 가능할지 몰라도 그걸 증명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파노라마 섬 기담
어느 지방의 외딴 섬을 재력가 고모다 가문이 매입하고 엄청난 공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는 중단되고 섬은 폐허 상태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고모다 가문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일의 전말이 밝혀지는데...
상당한 분량에 세세한 묘사가 많은 편이다. 간혹 너무 세세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어서 약간 읽기 힘들기도 하지만, 그 만큼 작중에 나타난 환상적인 부분은 방대하다. 환상을 넘어서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무섭게 다가오기도 한다. 현실적이지 않는다면 모를까, 여기에 나오는 요소들이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렇다. 환상을 실제로 구현하는 시도가 지금도 있지만, 의도가 좋지 않다면 그건 괴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처럼 역시 추리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 범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도드라지다보니 도치서술형 추리로 볼 수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펼쳐지는 거대한 환상 세계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요소로 보이지 않게 된다.
일인이역
지루한 걸 참지 못해 아내를 두고도 다른 여자를 수시로 만나러 다니는 T.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재미있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다른남자로 변장해서 아내와 사귀어 보는 것인데...
가장 평범한 내용으로 점점 기묘한 색채가 띄는 것이 특징이다. 앞서 나왔던 환상들이 시각적으로 나타낸게 많았다면, 이것은 심리적인 면이 강하다. 모든 게 그대로이면서 다르다는 인식이라 실제로도 이런 기분을 겪어본 경우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보통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환상적인 걸 넘어 기괴한 부분이 없이 나름 훈훈한 분위기라 어딘지 모르게 교훈적이라는 느낌이다.
목마는 돈다
회전목마 안에서 연주를 하는 악단의 나팔수는 매표원인 어린 여성에게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을 느낀다. 자신의 처지와 가족에 대한 스트레스로 점점 매표원에게 집착하던 나팔수는 어느 날, 회전목마에 탄 한 청년의 수상한 행동을 목격하게 되는데...
<일인이역>과 함께 평범한 내용으로 인생의 일탈을 환상적으로 나타낸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이들이 가끔 꿈꾸는 게 일탈인데, 아마 그게 가장 현실적인 환상이지 않을까 한다. 특별한 요소 없이 환상적인 색체라 더욱 기묘하게 보인다는 인상이다.
이래저래 신경쓰는 일 없이 내키는대로 즐기는 것, 단 한 순간일지 몰라도 이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환상이라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 목마는 돈다고 하는 걸까. 그 화려한 한 순간이 영원히 돌았으면 하는 염원일까?
거울지옥
친구들과 무서운 이야기를 돌아가며 하던 중, K라는 친구가 한 이야기다.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렌즈와 거울에 광적인 집착을 가졌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개인 작업실에 틀어박힌 친구는 기괴한 거울 세계를 만들어 놓는데...
거울 역시 전통적인 공포, 환상적인 소재다. 대체로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 대한 부분이 서서히 확장되면서 공포를 이루고는 한다. 여기서 나타낸 거울은 나름 과학적인 근거가 기반이 됐는데 그래서였을까, 환상을 넘어서 괴기스럽기까지 한다. 실존하는 금단의 영역이라 지칭되는 만큼, 그 어떤 기술과 발견이라도 넘어서는 안 되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이 소설에 나온 거울을 실제로 나타낸 시뮬레이터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교토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일그러지다 못해 굴곡을 타고 흘러내리고 떠다니고 겹치는 게 잘못보면 멀미가 날 정도다. 이걸 진짜 사람으로 했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