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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7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09년 7월
평점 :
민간전승을 보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존재들이 등장하는 내용이 많다. 대체로 전국적인 것부터 특정 지방에 한정된 것까지 다양하다. 이게 단순한 소문일지, 아니면 진짜 목격담인지, 또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사람이 인위적으로 일으켰다면, 도대체 왜 그런 기묘한 짓을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기록한 사람이라면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어행사 마타이치와 인형사 오닌, 괴담 수집가 모모이치, 그리고 변장술사 지헤이가 돌아다니는 곳에서는 기묘한 일이 발생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 이상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나쁜 짓을 하고 눈치를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회피하려 하면서 보게 되는 환영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 길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귀신이니 요괴니 하는 초현상적인 존재들에 의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즈키아라이
한밤중 절에 돌아가는 길이던 승려 엔카이는 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하기위해 한 오두막에 들어온다. 그곳에는 오두막 주인 외에도 비를 피하려 들어온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어행사 마타이치가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를 제안하고, 얘기가 계속 될수록 빗속에서 팥을 이는 듯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엔카이는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비오는 날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사람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구성은 초등학교 앞의 문방구에서 파는 괴담집에서 이미 본적이 있었다. 그 내용과 구성은 비슷하게 보였지만 이 내용은 기현상을 빙자한 권선징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성격이 확실히 다르다. 보통 외딴 오두막이라는 배경에서는 내부에서 공포가 일어나는 내용이 많다. 그 내용에서는 도망칠 곳이라도 있지, 아즈키아라이에서는 외부에서 들리는 팥을 이는 소리와 내부에서 우연히 모인 사람들이 하는 얘기까지 더해 고립된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죄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죄가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하쿠조스
여우사냥꾼 야사쿠는 유메마야산의 여우숲에 있는 한 사당과 무덤 앞에서 잠시 쉬던 중, 여우탈을 쓴 여인을 만나게 된다. 야사쿠는 여자가 준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뒤, 젊은 글쟁이와 노인이 사는 집에서 깨어난다. 젊은 글쟁이는 야사쿠가 있던 사당과 무덤이 하쿠조즈라는 오래묵은 암여우를 모신 곳이라고 말한다. 그 얘기를 들은 야사쿠는 자신이 여우에게 홀렸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게 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는 여우에 관한 여러 설화가 있지만,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것은 매번 구미호라서 그런지 그 밖에 있을 지도 모르는 다른 설화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쿠조스는 흔하다 할 수 있는 여우요괴가 나오는 내용임에도 흥미로웠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들 간의 혼선을 이용해 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보면서, 현실에서 서술트릭을 실제로 하면 이런 형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입장에서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이런 일을 당하면 상당히 혼란스러울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약점을 잡혀서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배경이 옛날인 만큼 사람이 사람으로 둔갑한 사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쿠비
도모에가후치라는 깊은 못 기슭에는 마을사람들을 위협하며 사는 귀호 아쿠고로라는 망나니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박장 주인인 고산타는 아쿠고로에게 복수를 결심하게 되고, 참수인 마타시게는 한 노인에게 자신의 딸을 잡아간 아쿠고로를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도코로 주나이는 아쿠고로의 노름 친구인 어행사에게 아쿠고로가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쿠고로의 오두막 앞에서 목이 잘린 세 구의 시체가 발견 된다...
읽고나서 회본백물어에 기록된 마이쿠비 전설 속에 등장하는 목이 잘린 3인의 이름이 작중에 그대로 사용된 것을 알게 되서 작가의 치밀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얼핏보면 최악의 악인을 처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나섰다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권선징악 속에 숨겨진 권선징악이라는 느낌이었다. 하는 짓이 진정한 악인으로 보이더라도, 이용당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처음 알았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다는 것도 눈여겨 봐야할 것 같다.
시바에몬 너구리
아와지 지방에는 시바에몬이라는 존경받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노인은 마을 외곽에 인형극단이 오던 날, 손녀딸 하나가 살해당하는 일을 겪게 된다. 손녀딸을 살해한 범인은 잡히지 않은채 몇날 몇칠이 흘러가던 중, 시바에몬 노인의 집에 한 너구리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너구리를 반갑게 맞이하던 시바에몬 노인은 그 너구리로 부터 자신도 시바에몬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 그 다음 날 자신이 그 너구리라고 주장하는 노인이 나타나는데...
우리나라 민간전승에서 사람으로 둔갑하는 짐승으로 여우 외에도 호랑이가 있다고 들었다. 일본에는 여우 외의 대표적인 것이 너구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시바에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너구리의 대화는 분위가 무거운 작중에 잠시나마 유쾌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확실치 않은 조상내력을 들먹이며 현실의 책임을 묻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뒤틀린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고 현재를 부정하고 있기에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조상이 누린 권세에 눈이 먼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너구리였을지도 모른다.
시오노 초지
오시오가우라 해변에 말장수 부자로 유명한 우마카이 초자는 인심이 좋기로 유명했다. 특히 매월 열엿샛날 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배푸는 것은 먼 지방에 까지 소문이 날 정도다. 이 얘기를 들은 마타이치는 지헤이와 함께 과거 우마카이 초자의 가족이 도적을 만난 참극의 현장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앞서 나온 패턴과는 약간 다르게 마타이치 일행이 사건에 관한 조사를 하는 것이 먼저 나와서, 그 동안 마타이치 일행이 사전조사를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고기를 먹는다는 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지만, 옛날에는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운송수단으로 많이 이용되는 말은 그만큼 함부로 먹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먹는 다는 행위로 인해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는 전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야나기온나
야나기아라는 숙소에는 여관 건물보다 큰 버드나무가 정원에 있다. 그 버드나무는 예부터 저주받은 나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저주에 대한 소문 때문인지 숙소 창업자인 소에몬은 버드나무 앞에 작은 사당을 만들었으나, 현주인인 기치베는 저주고 부처님이고 믿지 않는다면서 사당을 없애버린다. 그 후, 기치베의 아내와 자손들이 연이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나무는 자연에서 나오는 한정된 자원이자, 지구의 대기와 환경에 큰 역할을 하는 식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옛날에는 우리나라 무속의 서낭당 나무처럼 신성시여겼거나 보통 나무가 아니라서 베면 저주를 받는다는 둥의 얘기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성하거나, 불길한 나무에게 사람의 죄를 뒤집어 씌운다면 얼마나 큰벌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자각을 하지만,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거기에 걸맞는 이유를 찾는 것만큼 비겁한 짓은 없을 것이다. 자각만 있다고, 곧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본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타비라가쓰지
가타바라가쓰지라는 갈림길에는 단림황후의 시신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야무네 린조는 한 사당에서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을 그린 구상시 그림족자를 보고 있는 마타이치를 찾아와 그 갈림길에서 일어난 일의 해결을 부탁하게 된다. 사건은 작년 여름부터 가타바라가쓰지에서 나타난 여자의 시체로 시작된다. 여자의 시체는 썩은 상태로 버려진 것이었다. 문제는 시체를 치운 후, 다음 날이 되면 또 다시 여자의 시체가 나타나고 갈수록 부패 상태가 심해진다는 것이다...
시체와 관련된 기이한 일이라는 점과 죽음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어서 다른 내용들에 비해서 약간 더 섬뜩한 내용이기도 했다. 일본에 시체 그림부터 썩어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전설이 있다는 것은 처음들어 보았다.
보통 살아있는 사람이 죽으면 몸과 영혼이 분리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이 관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살아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죽어서까지 사랑하게 된다면 과연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살아있을 적에 나누던 기억일지, 아니면 생명은 멈추었으나 이승에 남겨진 몸일지. 그리고 과연 그게 거짓없는 진정한 사랑일지, 아니면 욕망으로 가득 찬 집착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