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 매그레 시리즈 21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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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할 사정을 가진 이들은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돈다. 사실을 밝히면 몰려올 눈치와 비난 때문에 평소의 일상을 가장해서 만들어낸 또 다른 일상인 셈이다. 이런 이들이 그나마 안식처로 삼는 곳이 바로 벤치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멈춰 있을 곳이자,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는 교류의 장소다.

마냥 외롭고 쓸쓸한 세계로 보일 수 있지만 이건 생각 해봐야 한다. 이 벤치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세상이라는 것. 그 다른 관점을 통해 어떤 기회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괜찮겠다 싶으면 무작정 붙잡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어디로 향하고, 어떤 결말로 막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채로.

파리 생마르탱 대로의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칼에 찔린 시체를 발견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매그레 반장. 피해자는 루이 투레라는 창고 관리인. 구두와 넥타이는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와 다른 것이었고, 한창 회사에 있을 시간에 외진 골목에서 발견됐다는 점, 여기에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반장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회사를 찾아가 보니 이미 폐업 한지 3년이나 지난 후였고,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루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듣게 되는데...

실직한 사실을 숨기고 평소처럼 출근해 시간을 보내는 가장. 너무나 익숙한 광경인 한편으로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이런 모습이 있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더해진다. 결국은 무시 당하는 가장의 비애라는 흔해 빠진 이야기 아니겠냐고 하겠지만, 모든 이야기는 끝까지 보고서 판단해야 한다. 이게 단순 실직자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를 다루는 것인지 말이다.

루이 투레라는 가장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와 밖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평가가 상반되는 부분은 참 마음 아픈 부분이다. 사회에서는 하나의 사람으로서 대접 받지만, 집에 가면 그저 남들과 비교 당하며 무시 받는 게 전부인 공처가. 여기에 실직까지 겹친 상황이니 안타깝다는 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그에게 숨겨진 이면이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여기게 된다. 중요 단서로 구두가 언급되기에 더 그렇다. 구두란 직장인과 가장을 상징하는 물건에 해당된다고 본다. 바쁜 하루를 함께 하며 힘겹고 고된 나날을 상징하는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반자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와 장소에 따라 구두가 바뀐다는 점은 이런 의미로 볼 수가 있다. 서로 다른 세계를 나누는 경계선. 이게 어떤 세계로 향하는 구두인지 알아내는 것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사건의 결말이 다소 급하게 처리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여러 사람을 불러다 조사했는데도 별거 나오지 않았다가 갑자기 범인을 특정해서 끝내버리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매그레 반장과 함께 살펴본 주요 인물들을 중에서 이것만 확인하면 가장 의심스러운 게 누구인지 금방 나오긴 한다. 루이 투레가 살아가던 두 세계 중간의 회색 지대가 어디고, 누가 제일 사적인 곳에 가까이에 근접해 있는지. 그럼 지금까지 해온 조사들은 전부 무엇이었나. 그건 사람의 이면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피해자인 루이 투레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건 관계자들에게는 평소의 모습과 다른 그림자가 존재했다. 실패라는 현실을 가리고자 만든 환상과도 같은 평온한 일상. 작중에서 매그레 반장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파리에 왔을 때는 실패하고 절망한 자들이 눈에 먼저 띄었지만 차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인상 깊어졌다고. 이런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저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인파 안에서 진짜 삶을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어떻게든 실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매일 매일 환상을 만들어 가며 살아가는 이는 얼마나 될까.

환상이라는 이름을 보면 현실적인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해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정당하지 못한 방법 밖에 없다. 절박함 속에서 여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 반드시 남에게 피해를 줘야 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런 식으로 돌고 돌다가 이번 사건처럼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엮일 수도 있다고 하니 참 웃기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를 탓하기도 참 그렇다. 더 이상 다른 선택 없이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현실이었을 테고. 각자가 원하는 행복과 요구 받는 행복이 다르기에 생겨난 비극이나 다름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한 시대를 거슬러 내려와도 여전히 변함 없는 벤치란 공간은 셀 수 없을 많은 드라마와 함께한 산증인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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