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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후 항설백물어 - 전2권 -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8년 11월
평점 :
사람의 눈은 언제나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전에 비하면 사람의 눈을 대신해 다양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수단이 늘었다고 해도 여전히 이 정확성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직접 눈으로 보던, 무언가가 포착된 흔적이나 기록을 보던 그걸 해석하는 주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다. 그 주관에는 다양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편견, 신념, 환경, 심리적 상태, 입장, 경험 등등. 똑같은 걸 보더라도 다양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러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이건 알아둬야 한다. 무엇이 중요한가. 정확함의 유무인가. 아니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눈속임이나 헛점에 대해 생각해 보는 제 3의 관점인가. 불필요한 논쟁보다는 보다 더 넓은 시각으로 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주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던 <항설백물어 시리즈>는 이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메이지 시대까지 도달했다. 미신을 멀리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해석을 시도하는 풍조가 생겨나 괴이한 이야기는 이제 힘을 못 쓰게 된 시기다. 그럼에도 괴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이전에 비해 세상 한 귀퉁이로 밀려났을 뿐이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비록 눈앞에서 벌어지는 신기한 일은 줄었어도, 찾아보면 여전히 흔적 만은 남아있다. 하지만 단순 미신이다, 현실성이 없다면서 무시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이치에 맞는 가의 여부다. 그럼 다양한 경우의 수를 떠올려야지 그저 보통의 상식선에서 끝내면 되겠는가. 이러면 합리적이라 말하면서도 합리적이지 않은 거다.
시대적 배경이 현대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시점이라 그런지 작중에서 마타이치 일행이 그 동안 벌인 일들의 흔적이 보여서 꽤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전 작품에서 이러이러하게 사기를 치고 난장판을 벌였는데, 그게 시간이 흘러 이렇게 전해지고 있구나 하고. 어쩌면 현실에 전해지고 있는 기이한 이야기들 중에 진짜 이러한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전 작품에서 주로 요괴 같은 괴이한 존재를 주제로 삼은 것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 다루는 건 어떠한 현상이나 설화에 가까운 것들이다. 아마도 발전하는 시대 상에서 사람이 가져야 되는 관점의 문제를 다루다 보니 실질적인 존재보다는 현상이나 실체의 문제에 가까운 것들 위주로 다루었을지도 모르겠다.
붉은 가오리
도쿄 경시청 순사인 야하기 겐노신은 섬이 하룻밤 사이에 가라앉은 전설의 진위를 증명하는 문제로 친구들과 야겐보리의 잇파쿠 옹을 찾아간다. 그 얘기를 들은 잇파쿠 옹은 젊은 시절 직접 겪은 오가 반도의 에비스지마라는 섬에서 일어난 일들 들려준다. 에비스지마는 육지와 가까운데도 안개에 가려져 특정 장소에서만 보이는 신비로운 섬이다. 거센 조수가 흐르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배를 정박하기 어려운 그 곳에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금기를 어기면 재앙이 온다. 수 많은 옛날 이야기에서 나오는 요소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믿는 가운데 유일하게 의문을 가지고 반발심을 가지는 이가 금기를 믿지 않고 사고를 친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고 믿지 않은 어리석은 자만 벌을 받는다. 이런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게 마냥 좋은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 다면 어떨까? 관점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의미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에비스지마라는 섬을 보면 <위커맨>, <미드소마> 같은 포크 호러에 나올 법한 마을 그 자체다.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된 환경. 바깥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그들 만의 규칙. 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생활상. 비상식적인 논리로 벌어지는 잔혹한 행동. 보통은 그저 이러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기괴함에 공포만 느끼지만, 이 작품에서는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해석이 붙는다. 또한 이것이 생각보다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도 말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아 간다고 하지 않은가. 정확히는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의 이치가 부정 당한다는 것이 두려운 거나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이게 잘못된 것이고, 진짜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일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이건 상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관점의 문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느냐, 의문을 품고 금기라 불리는 선 너머를 볼 용기가 있느냐. 이건 곧,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소수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전체. 아니면 평범한 일상 속의 다수를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소수. 단순히 작은 시골에서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틀을 형성하는 그 어디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금기를 다룬 옛날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보자. 금기를 어김으로서 믿음으로 만들어진 작은 세상 너머의 실체가 나타난다. 금기를 어긴 자는 이 실체를 밝히기 위해 희생된 거나 다름 없고. 나머지 사람들은 살아 남았지만 좁은 곳을 벗어나 넓은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이러면 누가 교훈을 주고, 누가 벌을 받은 거라 할 수 있을까?
하늘불
겐노신은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다가 결국 잇파쿠 옹을 찾아간다. 최근 방화사건이 잇따르던 중, 어느 기름 가게가 완전히 전소한 일이 발생했다. 그 가게의 후처가 지금까지 일어난 방화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었는데, 전처의 얼굴을 한 불덩이가 나타나 불을 질렀다며 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잇파쿠 옹은 오사카에서 겪은 일을 들려준다. 셋츠 지방 어딘가에서 날아다니는 불덩이가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지역 마을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불은 사라진 뒤였고, 그 불을 없애버렸다는 스님이라도 만나보러 갔는데...
도깨비불이나 여우불이라고 허공에 떠다니는 괴이한 불에 대한 전설 역시 전 세계적으로 많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하나로 정리 되지 않고 각양각색의 해석이 붙는다. 원념의 불, 불타는 사람의 머리, 귀신의 불 같은 괴이한 현상. 번개, 곤충, 무덤 속 뼈에 포함된 인이 타며 발생하는 경우 같은 자연 현상. 이 중에 무엇이 정답이냐고 끊임 없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볼 수가 있을까.
믿음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한다. 똑같은 걸 보아도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마치 이러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예능 프로에 가끔 나오던 상자 내부가 보이지 않게 가려 놓고 손으로 만져서 무엇인지 맞추는 퀴즈. 오직 손의 감각으로만 판단하기에 같은 물건을 만져도 전부 제각각으로 해석하는 거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하늘불의 경우는 그 판단의 기준이 시각과 심리인 것이다. 어떤 마음 상태로 보느냐. 또는 어떤 마음 상태로 보아야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가. 사실 상자 속 물건 맞추기 퀴즈에서도 감각에 따른 심리적인 부분이 작용한다는 점에서 만물을 판단하는 기준에 심리 상태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는 것의 연장선이라고 해도 되겠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현실적이든, 괴이하든 간에 그걸 마주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심리 상태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된다는 거다. 제 아무리 별거 아닌 것도 신비한 무언가가 되고. 평소에 잘 알고 있다 생각했던 것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게 된다. 무엇이 진실이든 상관 없다.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다. 교훈이나 숨겨진 무슨 뜻이 있었다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어쨌든 간에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다.
상처입은 뱀
겐노신은 뱀과 관련된 사건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쓰카모리라는 오래된 가문의 이노스케라는 무뢰한이 뱀에 물려 죽었다. 그 뱀은 이노스케가 가문의 재산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 집 뒤편의 사당 안에 있는 돌 상자에서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 상자가 무려 70년 전부터 있었다는 얘기로 인해 사건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뱀이 70년 동안 살아 있다 튀어나왔거나, 그게 아니면 누군가 이노스케를 뱀으로 살해했거나. 이 이야기를 들은 잇파쿠 옹은 그 가문에서 사당을 만들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동물과 관련된 옛날 이야기 중에 유독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뱀이다. 사악한 요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아 보이지만,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도 꽤 된다. 명줄이 길다, 죽였는데도 이상하게 되살아났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생긴 이미지나 다름 없다. 그저 갑자기 튀어나온 순간이나 생김새만 보고 느낀 공포에서 비롯됐다면 사람으로 둔갑할 수도 있는 요괴가 되는 거고. 뱀으로 인해 이득을 보거나 나쁜 사람이 벌을 받았다면 신성한 존재가 되는 거다. 결국은 시선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일로 죽게 되면 지벌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벌을 받을 만한 짓을 해서 죽었다는 정도가 아니다. 단순 우연 치고는 너무나 절묘하게 비슷한 죽음이 연달아 겹치면 곧 지벌이 되는 것이다. 이걸 가지고 무엇이 진짜냐고 한다면 무어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저 인과율이 작용해 이어진 불행 혹은 심판인가. 아니면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마는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인가. 다만 이거 하나 만은 확실하다 할 수 있다. 비슷한 일이 연달아 발생하게 만들고, 그렇게 보이게 하는 관점이 존재한다는 거다. 만드는 것과 보이게 하는 것의 관점은 서로 다르겠지만 말이다.
간단한 이야기이면서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쉽게 정리하자면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와 그로 인한 비극을 다룬다고 볼 수 있겠다. 반드시 이게 맞을 것이라는 판단이 조금의 의심도 없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건 곧 고정관념이다. 맞으면 다행이지만, 세상 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라 틀리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이 틀렸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면 어떨까? 이게 바로 항간에 말하는 지벌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벌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대체로 사소한 일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기에 불행으로 이어지는 비극인 것이다.
앞의 뱀 문제도 마찬가지다. 명줄이 길다고 여겨지는 것도 뱀을 보며 생긴 일종의 고정관념인 것이다. 그렇기에 뱀을 확실히 못 죽인 이후에 다시 뱀이 나타났다면 똑같은 뱀으로 착각하게 되는 거다. 다른 뱀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 고정관념이란 일종의 착각을 일으키는 시각이자 주술인 셈이다. 이걸 끊어내거나 혹은 스스로가 화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은 틀렸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밖에 없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거의 살아남지 못하는 것일 테다. 왜냐하면 고정관념에 빠진 어리석은 자는 시야가 매우 좁기에 예상 밖의 상황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놓고 파둔 함정에 빠지거나, 혹은 조심성이 없어서 어처구니 없게 죽거나. 이걸 보면 지벌이란 누군가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빠져드는 거라 할 수도 있겠다. 지벌이 이어진다는 말도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부분에서 딱히 틀리지 않게 되고.
산사내
겐노신은 노가타 마을에서 일어난 부농 집안의 딸이 실종된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딸은 3년 전에 실종된 상태였는데 최근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 발견되어 돌아왔다고 한다. 산사내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아기를 데리고 말이다. 문제는 3년 동안의 행적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산사내와 함께 있던 순간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잇파쿠 옹은 엔슈에서 겪은 산사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산속에서 목격된 거대한 유인원처럼 보이는 생명체. 이건 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가장 많이 불리는 명칭은 빅풋과 사스콰치. 그 밖에 예티, 마핑구아리라는 것도 있다. 동양에도 일본의 산사람 외에 중국의 예렌, 한국에서도 청구야담에 모선(毛仙)이라는 것이 나타난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을 보면 공통적으로 다루는 문제가 이거다. 괴물인가, 사람인가. 단순 전설이나 괴담이면 흥미 거리로 보일 만 하지만, 이게 실제 생활과 연관 지어지면 여러모로 곤란할 부분이 많다. 지금도 여전히 민감한 부분인 차별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의 평등에 대한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신분 제도가 없어진 세상이라 하지만 여전히 출신지를 따지는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러한 곳 출신이다, 이러한 집안이다, 이러한 태생이다. 그래서 이런 것밖에 못한다, 이런 사람일 것이다, 이런 짓을 할 것이다, 라는 식으로 지레짐작하고 만다. 아예 사는 모습이나 환경이 다른 경우라면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작 무슨 일이 발생하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출신지와 상관 없다는 건 금방 나타난다.
멀쩡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람 같지 않다고 반드시 범죄를 저지른다는 법은 없다.
멀쩡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범죄를 저지르고, 사람 같지 않다고 반드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구분 없이 똑같은 사람으로 보고,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진정한 평등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규칙 앞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이건 시대가 바뀌어 세상의 규칙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즉 국가에서 제정한 법률이 생기고, 암암리에 허용되던 것이 금지된다면 그에 맞게 따라야 한다고 말이다. 옛날에는 다들 이런 식이었으니 괜찮다고 하면서 넘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차별 문제와 함께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하는데, 그걸 비유하는 걸로 산이 많이 나온다. 산에 사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만의 방식이 있다고. 확실히 산은 옛날과 지금의 인상이 많이 다르다. 옛날에는 산속은 뭐가 나올지 모를 매우 위험하고 신비한 곳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지금은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곳이긴 해도 신비함 따위는 없다. 옛날에 알던 산은 이미 없어졌다고, 문화가 사라졌다고 해도 되겠다. 이런 부분에서 옛날 사람들이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옛 정취와 흔적, 감성이 사라지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회자된다는 현실. 하지만 모두가 옛 것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니 어떠한 이유로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 이상, 다양한 방식으로 남을 수는 있을 거라고 본다. 비록 온전한 형태가 아닐지라도, 사실과 증명이 불가능한 풍문 같은 이야기가 되더라도. 오랜 옛날에 떠돌던 다양한 이야기도 이런 식으로 전해졌을 테니까.
오품의 빛
겐노신은 괴이한 불 사건으로 알려진 방화 사건 기사로 인해 어느 유명 유학자 집안의 화족으로부터 어린 시절에 체험한 기이한 일에 대한 진위를 파악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50년 전, 그는 산속에서 빛을 내는 어떤 여자에게 안겨 있었다고 한다. 그 여자에게 머리를 박으며 빌었던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였고, 그가 여자에게서 아버지의 손에 건네진 순간이다.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환한 불빛을 내는 커다란 백로가 날아가는 모습을 봤다고 하는데...
동물이 빛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해어 같이 빛을 내는 어류, 어두운 밤에 보이는 동물의 안광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빛을 낸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러한 불은 대체로 도깨비불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신성시하게 여겨지는 편이다. 한낱 동물이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니 이건 곧 고귀함이라고 말이다. 반면 사람이 이런 경우라면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좋지 않은 인상이나 소문만 남는다.
가만 보면 굉장히 뒤틀린 관점으로 보일 만하다. 분명 옛날 신화나 설화를 보면 태생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 꽤 있다. 알에서 나왔다느니, 하늘에서 내려왔다느니,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보호해 주던 아이였다, 부처가 지켜준 아이였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보면 흔히 말하는 출생의 비밀 같은 건 무조건 폄하 당하기 바쁘다. 잘못 태어난 아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그런 아이가 보기 싫은 부모에게 버림을 당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아이의 쓸모 여부로 소유권 분쟁 따지는 것이 먼저고. 대체 아이란, 생명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보자. 신화에 나오던 인물의 태생이 사실은 엄청 좋지 않았다면?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잘못 태어난 식의 배경이었다면? 그럼 그 인물의 고귀함이 없어지고 폄하 당해도 된다는 말인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축복 받아야 마땅하다. 축복 속에서 건강하고 좋은 방향으로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다. 그저 태생의 문제로 사람을 평가하고 편견을 가지면 이 세상 근간이 흔들리고도 남을 것이다. 평범하게 잘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고. 태어난 배경이 나쁘다는 이유로 훌륭한 사람이 저평가를 받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기에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이 있다면 굳이 파해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본다. 다만 당사자에게도 끝까지 숨기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이견이 있을 듯하다.
작중에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각오가 있더라도 굳이 진실을 알아서 좋을 일이 전혀 없다고 한다. 평생 모른 채로, 신화 속의 허황된 이야기 같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 들여 꿈 속에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이건 진실을 알게 되면서 발생할 혹시나 모를 후폭풍에 대비한 것인지, 아니면 때로는 진실보다 거짓이 더 나을 때도 있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절대 나쁜 의도로 숨긴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를 보라고 말이다. 뜻 자체로만 보면 꽤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이 선의의 거짓이 정말 아무런 뒤탈을 남기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바람신
친구들과 100가지 무서운 이야기라는 형태의 놀이 방식에 대해 의논하던 요지로는 혼자서 잇파쿠 옹의 거처를 찾아간다. 그런데 높으신 분이 방문 중이다 보니 잇파쿠 옹의 먼 친척인 사요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게 된다. 사요는 그 동안 잇파쿠 옹의 얘기만 들었으니 이번에는 자신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한다. 사실 사요는 잇파쿠 옹이 만나고 있는 높으신 분이 산 속에서 구조한 아이라고 하는데...
세상을 떠도는 온갖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바람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공기의 흐름으로 일어나는 바람처럼 이야기도 무언가의 흐름을 타고 움직이는 거라고. 그렇다면 바람을 일으키는 신이 있듯이, 이야기를 일으키는 신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바람이 곧 이야기라 한다면, 바람신은 이야기신이라 할 수도 있겠고. 그래서 바람과 관련이 없으면서도 관련 있는 듯한 기묘함이 느껴진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의 근간과 실체에 대해 다루는 내용 속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 꽤 있었다. 요즘은 이상한 소문이 돌면 뭐든지 쉽게 믿고 만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온갖 요괴와 전설, 미신이 판치던 오래 전에는 애초에 그런 이야기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믿지 않았다면 왜 이런 이야기들이 남게 되었을까? 그건 이렇다.
없으니까 오히려 믿고 싶다.
거짓을 거짓인줄 알면서도 믿고 싶다.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사는 재미가 없으니까.
사실 이러한 옛날 요괴나 전설, 미신을 보면 대부분 끝맺음이 단정적이 않다. 이러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진다, 이렇게 알려져 있다, 그렇게 부른다. 보면 알겠지만 전부 말 뿐이다.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반면 요즘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 부정적으로 대응하는데, 이건 오히려 믿고 있다는 반증이나 다름 없다. 왜냐하면 있다는 인식이 있음으로서 부정하고 싶어지는 감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애초에 없다는 인식이 있으면 부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없으면 부정할 필요도 없이 없다 하면 그만이다.
《회본백물어》에 있는 바람신에 대한 기술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을 보면 입에서 노란 바람을 뿜는다. 그 바람에 맞으면 반드시 역병에 걸린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황사와 비바람으로 인한 전염병을 연결 시킨 거라고 하는데, 이걸 이야기로서 보면 어떨까. 바람은 평범한 이야기. 노란 바람은 괴담 같은 기이한 이야기. 노란 바람에 맞으면 역병에 걸린다는 건,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 노란 바람을 뿜는 다는 것도 굳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즐긴 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걸리는 역병은 아마 제각각일 것이다. 그저 이야기로서 받아들이는 섬뜩함일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며 다가오는 공포일 수도 있고, 그저 신비로움에 감탄하여 느끼는 경이로움일 수도 있다. 물론 노란 바람을 그저 황사라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한낱 시시한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다.
이렇듯 이야기에 대한 관점을 다루다 보니, 지금까지 과거 회상을 다루던 내용과 다르게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정확히는 요괴와 전설이 존재했던 과거로부터 시작해 아직 끝이 맺어지지 않은 이야기를 미신을 멀리하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 해결한다는 다소 묘한 구성이다. 더 이상 미신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시대에도 이야기의 생명력과 힘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해서 빠져들게 한다. 이게 바로 이야기가 만드는 경계구나. 현실에서 비현실로, 그리고 비현실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체험이란 이거구나. 그렇게 바람신은 단 한 번의 깊은 영향력을 남기고 영원히 사라졌다. 그 어떤 아쉬움 없이 편안히. 남겨진 바람이 영원히, 비록 나중에 가서는 원래 형태를 알 수 없게 변하더라도 널리 널리 퍼져 나가며 살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