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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속 트릭의 비밀 ㅣ 문학의 숲 17
에도가와 란포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19년 8월
평점 :
추리 소설의 역사가 긴 만큼 많은 작품들이 나왔고, 그 만큼 온갖 트릭들이 나왔다. 나올 것은 거의 다 나왔으니 더 이상 새롭게 구상할 것이 없다는 말이 자주 나올 정도다(원서로 1950년대에 나온 이 책에서도 언급된다.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트릭은 거의 다 나왔다고.). 재미있는 것은 이럴 때마다 어떻게든 새로운 가능성과 재구성이 나와서 트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시대가 변해갈수록 트릭 역시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이런 건 반칙이라고 하거나 추리가 아니라고 여겨지던 것이 요즘에 와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지금 보면 시시해 보이거나 역시나 반칙에 가까운 황당한 것이 그 당시에는 상당히 기발하게 보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부분에서 트릭을 참고하려 해도 시대적 차이 때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뭐, 어디까지나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고 호불호의 문제긴 하다. 옛날 트릭을 보고 역사적인 접근 방식으로 추리 소설의 과거가 이랬구나 하면서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추리 소설 초창기에 에도가와 란포가 트릭에 대해 정리해서 쓴 글이다. 대중적으로 보기 쉽게 썼다는 점에서 간단하게 기술된 부분이 많은 편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언급만 하고 자세히 다루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 트릭에 관해 가볍게 쓴 수필에 가깝다(실제로 서문에서도 저자는 이 책은 쉽게 쓴 수필을 엮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탓에 지금 시점에서 보면 약간 시시하게 느껴지거나, 원하던 내용은 없고 뻔한 것만 있는 식으로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오히려 추리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나 다름 없다고 언급 되는 작가의 다른 글인 <유형별 트릭 집성>이 더 흥미롭게 보일 것이다.
수많은 트릭을 접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트릭에 대해 폭 넓게 보는 경향이 보인다. 종종 추리 소설에 쓰이면 반칙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공정성을 논하는 건 추리 소설을 작가와 독자의 수수께끼 풀이 게임이라고 생각해서 나오는 주장인데 그렇게 협소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한다. 추리소설의 규칙이나 법칙 같은 것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갈수록 트릭을 만들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규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을 오히려 도입하는 추세라고 하니까. 아예 억지스러운 것이나 비합리적인 것까지 좋게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해 보여도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게 그럴 듯하게 써서 독자를 납득 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이게 작가의 역할이고, 그래서 탐정소설이 어렵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트릭을 현실성 문제보다는 가능성 문제로 보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꽤 다양한 트릭에 대해 다루는 한편으로 이 안에서 실제로 활용할 만한 것은 몇 개 되지 않아 보이긴 하다(암호 관련 부분은 <유형별 트릭 집성>에서 인용한 글이라 그런지 꽤 활용할만하긴 하다.). 저자의 말처럼 그냥 보면 유치하고 재미 없어 보이거나 황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렇다. 그냥 잊혀진 무명 작가의 작품이 아니고 지금도 꽤 알려진 작가의 작품에 나온 경우가 있어서 적지 않게 놀랄 만하다. 그 만큼 당시의 추리소설 트릭은 가능성에 중점을 둔 실험을 많이 했다는 걸로 보인다. 가능성을 넓게 보면 쓰지 못할 트릭이 더 많겠지만 그 안에서 그럴싸한 것이 발견될 수 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와 별개로 반복된 사용으로 인한 진부함과 가능성을 너무 크게 보는 극단적인 발상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거다. 단순하고 도저히 써먹지 못할 발상이라도 생각을 진전 시키면 하나의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저자가 본인의 소설 하나를 예시로 들어 설명한 부분을 보면 기발함과 단순한 발상은 한 끝 차이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무리 좋은 소재나 참신한 트릭이 있다 해도 글을 쓰는 사람이 재미 없게 다루면 못 써먹는 것은 똑같다는 말이다.
트릭에 대해 다룬 책이지만 다양한 종류를 모아 놓은 사전이나 참고 글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일종의 방법론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고 본다. 트릭을 어떻게 구상해야 되느냐, 트릭의 범주를 어디까지 보아야 하느냐, 트릭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인가, 트릭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 트릭의 시초는 어디서부터인가, 등등. 편견이나 제한 없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트릭에 대해 논하기 때문이다. 특히 반 다인 식의 논조는 추리소설을 빈곤하게 만든다고 불만이라 하는 부분을 보면 얼마나 넓게 보는 시각이었는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다. 앞으로의 추리소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걱정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록 지금 시점에서 보면 옛 연구 기록이긴 하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현재에서 무언가 떠오르지 않고 막혔을 때, 옛날 기록을 찾아보면 조언이나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