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두리틀 박사의 바다 여행 - 1923년 뉴베리 수상작
휴 로프팅 지음, 김무연 그림, 김선희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20년 1월
평점 :
온전히 즐거움만으로 독서를 할 때가 있었다. 처음 도서관 대출증이 생겼을 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골라나온 동화책들부터, 방과 후 거실을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읽었던 만화책들까지, 책은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오롯이 즐거움이었다. 지금은 스마트 폰과 각종 자극적인 것들의 방해로 예전과 같은 순수한 즐거움만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두리틀 박사의 바다여행>을 읽으며 오랜만에 그때의 즐거운 세계로 돌아가 볼 수 있었다.
1900년대 초 영국 퍼들비 마을에 살고 있는 ‘두리틀 박사’는 동물의 말을 하는 저명한 박물학자이다. 그는 마을 구두 수선공의 어린 아들 ‘토미’와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게 되고, 둘은 잘 맞는 파트너가 되어 동물들과 다양한 경험을 한다. 어린이 문학이라 만만히 볼지 모르지만 모험이 중심축이 되는 소설인 만큼 서스펜스를 지니고 있어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했다. 불독이 영국의 근엄한 재판 법정 증언대에 서는 것도, 동물들이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모험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것도 모두 재미있었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두리틀 박사의 진보적인 가치관이었다.
세상의 오래된 비밀들이 궁금해서 조개의 말을 공부하고, 어린이인 주인공 토미를 어른과 같이 정중한 태도로 대하는 두리틀은 읽는 이에게 절로 웃음을 짓게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들에게 자애로운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가두어놓고 착취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두리틀은 그들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진정으로 동등한 친구로 대한다. 앵무새인 폴리네시아를 사랑했지만 고향을 그리워하자 슬퍼하며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폴리네시아는 그의 ‘애완 조류’가 아닌 진정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수족관과 동물원, 투우 등 동물을 착취하는 산업을 강하게 비판한다. “아프리카의 떠오르는 태양, 야자나무 사이로 속삭이는 바람, 덩굴 속의 초록 그림자, 큰 별이 빛나는 시원한 사막의 밤, 힘든 하루의 사냥을 마친 뒤 듣던 폭포의 물소리를 버리고, 사자나 호랑이가 얻은 게 뭐냐 이 말이다. 그래, 이런 것들 대신 사자나 호랑이가 무얼 얻을 수 있겠니?”라는 말 속에서 그가 얼마나 진정으로 동물들을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북극을 발견했지만 “사람들이 알면 석탄을 가져가려고 북극 여기저기를 파헤치고 무슨 짓이든 다 할 것”이라는 북극곰들의 부탁으로 북극의 비밀을 함구한다. 100년 전에 이와 같이 동물권과 환경을 생각한 인물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그는 결혼과 사회적인 명성, 부도 거부한 채 모험을 떠나 자신이 사랑하는 동물들과 박물학에 일생을 바쳤다. 이 소설이 1920년대에 쓰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치관은 충분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쓰이고 100년이 지난 지금, 동물들은 여전히 철창 속에 갇혀 물건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고 북극곰은 발 딛고 설 터전을 잃었다. 100년 전 인물의 생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고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지금의 아이들은 유리 안에 갇혀 있는 동물들과 녹아내리는 빙하의 이미지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두리틀 박사의 생각이 더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자신이 지구의 주인인양, 우주만물을 통틀어 이처럼 존엄한 생명은 없는 듯 오만하게 굴고 있지만 엉망인 세상을 볼 때면 그저 내가 인간인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소설 속 토미와 두리틀은 동물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지혜를 빌려 위기를 모면한다. 비인간 동물들인 인간들이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의 신비와 정글의 비밀을 알고 있다. 작가는 두리틀 박사를 통해 우리는 자연과 동물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듯 했다.
이처럼 깨어있는 생각들에 감명 받기도 했지만 시대의 퀘퀘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부분들 또한 여럿 있었다. 우선 ‘벙어리’, ‘귀머거리’ 등의 장애인 혐오 표현들이 그대로 등장했고, 다정한 오리로 나오는 ‘댑댑’이 어린 주인공 토미에게 “정신병원에나 가시지”라고 말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이런 것에 대해서 편집상에서 수정할 수는 없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원문을 살려야 하기 때문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읽는 책인 만큼 잘못된 표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각주를 달아서 “‘언어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등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둘째로 아쉬웠던 점은 원주민들을 아주 불쌍하고 미개한 존재들로 그린 것이다. 이런 식의 서사는 영국 제국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영국인들은 원주민들 입장에서 전염병이나 옮기는 잔인한 침략자에 불과했다. 문명이 언제나 인류를 구원하는 빛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셋째 소설 속에서 여자들은 항상 누군가를 돌보는 지위, 엄마, 아내, 첩 등으로만 짧게 등장한다. 심지어 동물들조차 암컷인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그려졌다. 남자아이들은 이 책을 읽고 다양한 남성상을 접함으로써 큰 꿈을 꿀 수 있겠지만, 여자아이들은 그럴 수 있을까? 최근에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가 <닥터 두리틀>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것으로 아는데, 100년의 시간이 지난만큼 이러한 점이 개선되었길 바라본다.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짧게나마 언급되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아이들에게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책이라 생각하기에, 내가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같이 책 속의 잘못된 점들을 찾고 생각을 나누는 활동을 해보고 싶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 만큼 현재의 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의문이지만 유의미한 활동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 책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다른 아이들에게도 책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으면 한다. 두리틀 박사와 함께 바다를 항해하며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독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