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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기와 거주하기 - 도시를 위한 윤리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임동근 해제 / 김영사 / 2020년 1월
평점 :
새로운 불안이 파리인들을 엄습했다. 187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 초반에, 교통 체증으로 인한 운전자 불만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느린 움직임이 정상이던 시절에는 길이 막히더라도 불안은 적었다. 비비 꼬인 구시가지 도로의 교통 정체를 당연한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로 교통 정체는 도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신호로 해석되었고, 길이 막혔다는 불안감이 고조되어 분노를 유발하곤 했다. 대중 속에서 신체적 접촉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은 -그리고 교통 정체에 갇히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같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구축된 감수성이다. 우리에 비하면 선조들은 훨씬 느긋했다. 그들은 지금 같으면 슬로푸드라 불릴 것을 먹고 살았고, 도시 속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이를 도시가 ‘완전한 정지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스만은 대로 네트워크를 통한 쉽고 자유로운 이동성을 ‘좋은 도시’에 대한 정의의 핵심에 두었다. 이런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강조는 20세기 도시계획가들의 지침이 되었고, 뉴욕 고속도로 네트워크의 건설자 로버트 모지스에게도 이동성이 최우선 과제였다. 오늘날 전력 투구하며 성장하는 베이징 같은 도시의 계획가들도 오스만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해 고속도로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다. 도로-속도의 경험이 ‘빠른 것은 자유, 느린 것은 부자유’라는 특정한 버전의 현대성을 정의한다. 원하는 곳이 어디든 언제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는 공식은 거주지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축소시킨다. 당신은 그저 지나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오스만의 유산은 심술궂다. 네트워크화된 빌은 시테를 축소시켰다. (p.59)
도시라는 개념은 물리적 장소로서의 도시 ‘빌’과 지각, 행동, 신념으로 편집된 정신적 도시인 ‘시테’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노동과 도시화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리처드 세넷은 열린 도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열린 도시를 만들기 위한 도시 계획에는 윤리적 겸손함이 함께 해야 한다. 도시의 효율성과 빠른 속도가 가장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그것을 ‘심술궂다’고 표현한 것은 신선했다. 20세기 말에 태어나 언제나 ‘빠른 것은 자유, 느린 것은 부자유’라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품고 살았는데, 리처드 세넷의 주장에 의하면 빠른 것이 우리의 자유를 앗아갈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슬로우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나는 것이겠지.
속도의 문제를 넘어서 리처드 세넷은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정치경제학 등 방대한 배경지식을 이용하여 도시에 대한 생각을 풀어낸다. 이 책을 통해서 도시라는 개념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았고 정치나 경제학 등의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보니 읽으며 막히는 부분도 많았다. 배경지식이 풍부하고 도시 계획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최고의 양서가 될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꾸준히 한 생각은 “편독하지 말자”는 것.. 발자크, 스탕달 등 문예사조론 시간에 배운 작가들이 나오니까 책이 너무 재밌었는데 다시 막히는 부분이 나오자 읽는 게 힘들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이나 에세이, 사회학 등 내 관심사만 편독했으니, 배경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저자분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관심 없는 분야의 책을 읽는다는 건 고통스럽고도 즐거운, 귀한 경험이었다. 아마 내 좁은 세상을 억지로 넓히려 하다보니 고통스러운 것 같다. 결론은 어렵지만 방대한 지식과 저자의 윤리적 사상까지 듬뿍 담겨 있는 좋은 책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