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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줄리애나 배곳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평점 :
SF는 광활한 우주와 최첨단 기술을 다루지만, 한편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에 수록된 ‘포털’과 ‘비전들’은 각각 인간과 로봇의 성장을 다루는데, 과학 기술과 감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포털’은 세상 곳곳에 나타난 구멍을 통해 치유와 성장의 과정을 그리며, ‘비전들’은 인간을 대신하는 휴머노이드들의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SF적 상상력을 활용하면서도 공통적으로 개인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포털’은 어느 날 세계 곳곳에 생겨난 구멍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후 구멍을 보기 시작하는데, 점차 많은 이들이 구멍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구멍이 슬픔으로 인해 생긴다고 생각했지만, 구멍 안의 세계를 엿본 주인공은 수치심과 비밀, 공포, 열망과 같은 강렬한 감정들 또한 현실에 균열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닫는다. 주인공이 구멍 속에서 보고싶어 하던 친구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동화되는 경험을 하는 장면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밀한 자아 속에서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과 에이든은 구멍을 통해 자신의 시련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해 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둘이 흙무더기 속 구멍을 찾아내고 이를 바라보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이들이 이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한뼘 성장한 모습으로 현실에 충실할 것을 암시하며 희망적인 여운을 남긴다.
한편, ‘비전들’은 휴머노이드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자아의 본질을 탐구한다. 아트리스와 벤의 비전은 바쁜 주인들을 대신해 결혼식에 참석한다. 비전들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일정한 사고와 감정을 지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냉대한다. 아트리스와 벤의 비전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입력된 단어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조합해 소통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로봇을 넘어 스스로의 의미를 고민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한다. 시스템이 고장날 것을 알면서도 둘이 물 속에서 편안하게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포털’과 ‘비전들’은 공통적으로 성장에 대해 다루면서, SF의 틀 안에서 감성과 철학을 조화롭게 담아냈다. ‘포털’은 자아의 위기를 극복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비전들’은 기계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깊게 고민해볼 여지를 준다.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에 수록된 다른 소설들은 ‘포털’이나 ‘비전들’과는 또 어떤 다른 생각할 거리를 줄지 기대가 된다.
"당신은 뭘 하죠?" 그녀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 아트리스가 묻고 싶었던 말은 우리는 뭘 할까요, 우리는 저 인생들을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였다. (’비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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