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한 전나무의 땅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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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뾰족한 전나무의 숲'을 읽는 내내 평화로운 감정이 내 주변을 감도는 느낌이었다. 어수선한 현실이 마음이 어지럽더라도, 이 책을 펼치면 저 멀리 메인 주 뉴잉글랜드의 평온한 해안가 마을, 더닛 랜딩으로 떠날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낯선 구조에 소설의 서사를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익숙해지고 나자,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가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의 두께가 점점 얇아지는 것이 아쉬웠다. 왼손에 잡히는 책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마음은 충만해지는데, 점점 얇아지는 오른쪽 두께에 마음이 헛헛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라니.


 이 책은 특이하게도 화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화자의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어떤 사회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여름을 맞아 더닛 랜딩에 왔으며, 나이가 지긋하고, 글을 쓴다는 점 정도만 알 수 있다. 하지만 화자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되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화자에게 더 쉽게 동화되어 작품 속에 몰입할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새 내가 화자가 되어 더닛 랜딩에서 머물고 있는 기분이 든다.


 화자의 담담한 서술 또한 이 소설의 백미이다. 감정 표현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시종일관 더닛 랜딩과 사람들에 대해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화자가 바라본 더닛 랜딩은 뾰족한 전나무가 늘어선 해안선과 절벽에 농장들이 서 있고, 아름다운 섬들이 수놓은 푸른 바다에 파도가 넘실거리는 곳이다. 풍경에 대한 설명이 나올 때마다 내 눈앞에 아름다운 그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여기에 넉넉한 인심의 토드 부인을 비롯해 나이에 걸맞는 현명함과 어진 마음을 지닌 블래킷 부인, 무뚝뚝하지만 심성은 착한 윌리엄, 과거의 무용담에 빠져 있는 리틀페이지 선장, 떠난 아내를 그리워 하며 그녀와의 추억 속에 빠져 사는 일라이저, 그리고 작중에선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실연의 아픔에 젖어 고독한 삶을 선택한 조애나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포용하며 살아간다. 갈수록 각박해지고 뾰족해지는 내 마음을 돌아보며 좀 더 둥글게 다듬어 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이 소설은 화자가 더닛 랜딩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책을 읽는 나도 마치 긴 휴가가 끝난 것 같은 마음이었다.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전형인 더닛 랜딩이 내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잡은 듯하다. 윌라 캐더의 ‘루시 게이하트’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읽는 미국 지방주의 소설인데, 어째서 윌라 캐더가 그토록 극찬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극적인 드라마는 없지만, 머리맡에서 듣는 가만가만 속삭이는 이야기와 같은 이 소설은 언제라도 손 닿는 데에 평화로운 마을을 가까이 둘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책이다.

이런 여름의 행복에도 한계는 있겠으나 단순한 생활이 주는 편안함은 충분히 매력적이라 소박한 삶에 결핍된 바를 채워주었고, 평화가 선사하는 선물은 분투하는 살아가는 자들이 누리기 어려운 법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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