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진민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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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언어들이 주는 느낌은 제각각 다르다. 부드러우면서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의 프랑스어, 새가 조잘대는 듯한 스페인어, 악센트가 분명해 딱 떨어져 깔끔한 느낌의 영국식 영어 등등. 이 중 독일어는 특유의 목을 긁는 소리와 파열음 때문인지 굉장히 강하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이걸 이렇게 합친다고?’ 싶은 단순한 조어 방식이나 온갖 것(특히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가 있다는 점도 독일어의 신기한 점이다.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닌 관념을 반영하고, 그 관념을 변화시키기도 하면서 사용자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한다. 그 언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단어에는 사용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 역사가 녹아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궁무진한 어휘를 지닌 독일어는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16개 독일어 단어의 기원이나 의미, 예시를 담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사전과 뭐가 다를까 싶지만, 이 책은 각 단어들을 토대로 독일인과 독일 사회의 단면들을 보여주면서 단순히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16개 단어 중 가장 와 닿았던 단어는 Stolperstein. 걸림돌이라는 단어는 떠올리면 가장 먼저 넘어지다라는 동사가 생각난다. 걸림돌은 진로를 방해하고, 일정을 지연시키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걸림돌은 기꺼이 걸려 넘어져서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치의 광기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이나 일터에 심어진 황동판. 언젠가 독일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는 Stolperstein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고도 뭔지 몰라서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아쉬워졌다.


 걸림돌로 시작한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독일의 과거사 반성으로 이어지고, 최근의 난민 수용 정책으로도 연결된다. 과거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테두리를 쳐놓고 그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독일은 이제는 앞장서서 난민을 포용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 모든 독일인이 찬성하는 것은 아니고, 최근 국제적 트렌드(?)인 극우 세력들도 존재하지만 저자의 말과 같이 여전히 Stolperstein을 설치하는 독일이라면 난민 문제에 대해서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Melden이라는 단어에서는 규칙을 중시한다는 독일인에 대한 선입견을 넘어 독일 사회의 기저에 깔린 타인을 존중하는 공동체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내 의견을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 사실 가장 기본적인 규칙인데 나부터도 잊고 있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을 주워넘기며 목소리 키우며 내 의견만 관철시키려고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심지어 승패의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지극히 독일어답다고 생각한 Habseligkeiten이란 단어를 보고는 자타공인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지닌 물건들을 바라보며 그 물건들이 주는 감상을 한껏 느낄 수 있었고, Feierabend라는 단어에서는 김신지 작가의 ‘평일도 인생이니까’라는 에세이를 떠올리며 말 그대로 ‘저녁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Rauswurf라는 단어를 보면서는 철학의 나라 독일답게 어릴 때부터 세상에 던져지는 경험을 하는 어린이들을 보며 웃음이 나왔고,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이미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삶이란 무엇인가 잠시 진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저자의 위트있는 문장과 독일 사회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웃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기도 하면서 16개 독일어에 담긴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갔다. 독일어를 이루는 조각인 단어들을 퍼즐처럼 하나 하나 맞추다 보면 내가 몰랐던 독일이라는 사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가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다른 세상에 대한 이해는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서는 나에 대한 사유로도 연결된다. 저자가 들려주는 독일어 단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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