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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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시 게이하트를 읽으면서 그녀의 짧은 삶이 덧없어 보이면서도, 그래도 나름 뜨겁게 살다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뤘지만 삶이 공허한 중년의 음악가와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음악가의 사랑은 진부한 플롯이다. 하지만 윌라 캐더의 섬세한 감정 표현 덕분에 흡입력 있는 스토리가 펼쳐진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 잠시나마 삶의 활기를 되찾고, 여자는 남자를 존경하며 삶의 깊이를 더해간다. 둘의 관계는 남녀간의 에로스라기 보단 청춘의 열정이 자아내는 동경과 그러한 청춘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에 가까워서 두 사람의 로맨스는 감정의 큰 진폭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그들은 영영 헤어지게 되고, 루시는 절망한다. 시카고를 도망치듯 떠난 그녀는 고향에서 예전의 생기를 잃은 채 어딘가 고장난 사람처럼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로 끝장내 버린 해리 고든과의 관계를 회복해 보려고 하지만 해리는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여기서 잠깐 의문이 든 게 루시는 왜 굳이 해리와 다시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걸까하는 점이다. 루시에게 해리는 속물적이지만 그만큼 안정된 삶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루시가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자신에게 깊은 호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무참히 끝내버린 행동은 분명 미숙했다. 물론 그 이후 해리의 행동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세바스찬이 떠난 이후 해리와의 친분을 되살리고 싶어서 여러 노력을 한다. 세바스찬을 알기 전, 그래서 평범하지만 대신 상처입을 일도 없었던 과거에 대한 향수였을까?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그녀는 안정을 표상하는 해리와의 관계를 통해 조금이나마 치유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으로 세바스찬을 만나고 사랑에 빠졌던 그녀는 다시 음악으로 삶에 대한 열정을 되살린다. 세바스찬과의 사랑은 한 남자에 대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삶에 대한 찬미와 애정이었다. 루시는 이제 삶 그 자체를 연인으로 삼아 세바스찬을 추억하며 자신의 인생을 풍성하게 살아갈 참이었다. 그녀는 '젊고 튼튼했으며 세상이 자신을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루시가 뜨거운 열정을 되찾은 순간 차가운 얼음 아래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 작품의 묘미는 루시가 떠난 이후의 이야기인 3부이다. 작가 스스로도 3부가 가장 훌륭하다 평했다고 한다. 아스라히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 루시를 담담히 추억하는 사람들. 특히 루시를 사랑했지만 서로 이해하진 못했던 해리 고든이 루시에 대한 기억을 곱씹는 부분을 보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루시가 세바스찬을 잃고 고통받았듯이 해리도 루시를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 스스로를 종신형을 받았다 자조한다. 게이하트 가족의 집 앞에 그녀가 남긴 달아나려는 듯한 발자국을 바라보며 그는 살아있는 동안 루시를 회상하고 또 회상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상실과 기억이라고 볼 수 있다. 1부는 친한 동료를 하나하나 잃으며 그들에 대한 기억 속에 침잠하는 세바스찬, 2부는 세바스찬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고 그에 대한 기억으로 삶의 의지를 되찾는 루시, 3부는 루시가 떠난 뒤 그녀에 대한 기억을 곱씹는 해리. 살면서 누구나 가까운 사람의 상실을 겪지만 그에 대한 기억으로 삶은 이어진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의 이번 컨셉은 날씨와 생활이다. 이 책의 주요 배경이 되는 시카고는 겨울에 춥기로 유명한 도시다. 하지만 루시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려 추위를 즐기고, 이겨내며 뜨겁게 타오른다. 날씨와 대비되어 루시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더욱 돋보인다. 이번에 출판된 다른 작품들은 날씨와 어떤 관계가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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