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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임지에서 100대 판타지목록을 발표했다. 고전으로 불리우는 반지의 제왕과 어스시 이야기등 이미 유명한 책들 말고도 처음보는 책들이 많아서 꼭 읽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올 해 들어 처음 으로 읽은것이 바로 이 책 키르케 이다. 매들린 밀러 작가의 두번째 책으로 첫 번째 책 '아킬레우스의 노래'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라는 영웅으로 삼아 그럴듯 했지만 두번 째 책 키르케는 제목만으로 의아했다. 아킬레우스나 제우스 만큼 유명하지도 않았고 내 기억속에 오디세이아에 잠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를 돼지로 만든 사악한 마녀였다. 500여페이지가 되는 키르케의 이야기라니 무슨이야기일지 알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너무나 짧게 아쉬움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고전이라 불리는 이야기들이지만 서양이라 불리는 유럽과 미국의 역사와 언어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주변에 일상처럼 사용되는 개념과 상표들에 스며들어있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이름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며 현재 유럽이라 부르는 대륙어 어원도 이 신화 속에서 나온다. 아킬레스건 이란 치명적인 약점이란 관용구가 일리아스에 나오는 등장인물로부터 나오는 건 모르더라도 그 의미는 다들 알고 평소에도 사용하고 있다. 영어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관용어로 쓰인다는 건 기원전 쓰인 문학과 신화의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신화와 고전이 일상적으로 쓰이지만 단편적인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해서 이윤기 작가님의 그리스 로마 시리즈를 다 읽었지만 각 신들의 에피소드 별로 알고 있었던 나에게 키르케는 읽는 내내 신선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를 읽은 이들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키르케는 타이탄 신인 헬리오스의 여러 자식들 중 하나로 비천하고 주목받지 않는 하급 여신이다. 보통 님프라 불리는 인간도 아니지만 신이라고 하기엔 큰 영향력이 없는 그저 아름다움으로 신들에 기쁨을 주는 하급 여신.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자신의 형제자매들에게도 사랑받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나약한 존재. 그녀는 스스로를 낮게 여기지만 호기심이 강했다. 인간이 궁금했고 착하고 순진하지만 심성이 따뜻했다. 인간에게 불을 내준 죄로 가혹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 삼촌을 돕고 싶어 해 물을 가져다주면서도 자신이 한 일에 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키르케 였던 그녀. 그녀는 점차 신들의 세상을 알고 인간들에게도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처음으로 사랑이라고 할까 호감을 가졌던 인간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능력인지도 모르던 힘을 사용해 불멸의 신으로 만들지만 그에 대한 사랑은 보답받지 못한다. 그에 따른 좌절과 질투로 그가 사랑한 님프를 괴물로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지만 고운 심성과 나약함 아직 여물지 못한 키르케에게 상처가 된다.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깨닫고도 아이아이에 섬에 유배당하게 되지만 그곳에서 진정한 마녀로 거듭난다. 유약하게 사랑을 바라고 아버지와 가족들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여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키르케. 헤르메스와 만나고 그녀를 무시하면서도 인정하는 동생 파시파에 때문에 명장 다이달로스도 만나게 된다. 파시파에의 만나러 가는 길에 자신이 만들어낸 스킬라를 만나 마음이 깎이고, 파시파에의 아들인 미노타우로스의 출산을 돕게 되면서 또 다른 눈이 뜨인다.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다이달로스에게 배틀 선물을 받는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그를 붙잡지 않는다. 다시 아이아이에로 돌아와 마녀로 살아가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애정을 갈구하던 아버지의 쓸모로 괴롭혀지고 자신이 사랑했던 동생 아이에테스의 딸인 메디이와와 이아손이 자신의 섬에 찾아와 정화를 해주지만 그녀는 메데이아에 의해 자신의 처지를 더 직시하게 된다. 또한 아이에테스가 변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며 자신이 나아갈 길 자신이 그동안 원했던 것들도 돌아보게 된다. 진정한 마녀로 변화하게 되는 것도 인간들에 의해서였다. 그녀는 그저 인간들 인간 남자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 했지만 그들은 그녀의 호의를 호의로 두지 않는다. 결국 마녀라는 이름을 얻고 섬에 오는 욕심 많은 인간들을 돼지로 바꾸어버린다. 그러던 중 오디세우스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오디세우스와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고 그 아들을 키우면서 또다시 변화하게 되는 키르케 결국 자신의 아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해야 할 것들을 받아들인다. 또한 또 다른 사랑을 얻어낸다.

이미 그리스 로마신화와 오디세이아를 읽은 이들에게는 내가 써낸 키르케의 내용이 스포일러가 될 수가 없지만 아예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큰 스포가 될 수도 있어서 자세히 쓰지는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어보게 되는 독자들이 나 말고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키르케는 처음 읽을 때는 그 이야기의 흡인력과 놀라움 즐거움에 매료된다. 특히 내가 보면서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내가 단편적
으로 알고 있던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에피소드가 키르 케라는 하급 여신 생각지도 못했던 주인공에 의해서 서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헬리오스의 흰 소, 프로메테우스, 제우스와 올림포스 신들과 타이탄 신들의 권력싸움, 라비린토스의 미노타우로스, 미노스왕이 그녀의 서사로 이어진다. 메데이와 이아손도 그녀에 의해 정화된다. 스킬라도 그녀에 의한 작품이다. 헤르메스와 관계로 올림푸스 신들의 이야기가 엮이며, 오디세우스와의 관계를 통해서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언급된다. 키르케를 읽으면서 그리스 로마신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의 내용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쓰이는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내 머릿속에서 그 연대기들을, 흥망성쇠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인간의 역사의 흐름으로 써 내려간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와 다른 하나의 여신 키르케의 탄생과 삶으로 신화와 역사가 아울러지는 환상의 서사시가 이루어졌다.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건 키르케 그녀 자체였다. 강력하고 거대한 신들 사이에서 나약하며 인간에 가까운 목소리를 가진 아무도 존재를 인식하지 않던 키르케의 성장과 자아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정이 안타깝고 슬프고 아름다웠다. 내가 여자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서양에서도 아직 여성이라는 면에서 사회에서 받는 차별과 불공평함을 신화와 이야기에서 더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그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불편한 모습은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그 불편한 부분을 드러내는 모습이 명확하고 세련되었고 합당했다. 보면서 나도 같이 불편했고 그런 이들에게 벌주고 해코지하는 키르케의 모습이 통쾌하기도 했다. 사랑인 줄도 모르던 사랑, 과시하기 위한 만남, 알면서도 포기하게 되는 사랑, 자존심과 자존감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주게 되는 사랑 키르케는 많은 이들을 만나서 사랑을 배우고 증오도 배운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나약한 님프로 아버지의 신전에 조용히 남아서 무력하고 하릴없이 지내던 키르케는 성장했다. 마녀로써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능력과 판단 능력도 생겼다. 두려운 대상이던 신들에게도 도전하고 부당한 것들을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게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쟁취해나며 부당하다. 이것 아니라며 목소리를 낸다. 누군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던 키르케는 마지막에는 행동하는 키르케로 변모한다. 사랑할 것을 선택하고 자신이 행한 일에 책임지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행동한다. 그녀는 성장했고 나아갔고 변화했으며 달라졌다.
이런 키르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전을 차용한 판타지 소설 속에서 나는 성장하는 소녀를 보았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여성을 보았다. 수동적으로 사랑받기를 마음으로 갈구하던 이가 적극적으로 쟁취하고 나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용기를 얻는다. 내가 하는 일에 하고자 하는 일에 여신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일개 인간 주제에 긴 세월을 허송했다 죽지 않는 신이 후회하는데 눈 깜짝할 새를 사는 인간이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나에게 삶에 지혜를 주고, 삶에 대한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수 천 년 전의 신화 속의 그녀는 현대를 살아가는 나와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보여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에 감탄하면서 읽고 또 읽어 두 번 반을 읽었다. 두 번째 읽으니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더 보고 싶어 다른 책을 뒤적이고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를 더 세세히 알고 싶어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렇지만 가장 보고 싶은 건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고 이미 좋아한다고 잘 안다고 하는 이에게도 권하고 싶다. 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보여주는 큰 용기의 신화 마녀란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자신의 힘을 가진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마녀의 기원 키르 케라 면 마녀라는 말도 나쁜 호칭은 아닌 게 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와 교훈 여성 주인공 서사의 멋진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이것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세상을 변화시킬 작은 불씨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란 세상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보고 세상을 보는 관점과 생각하는 것들이 달라졌기에 수많은 이들이 보고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꼭 갖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이 소중하고 많이 읽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자매품 아킬레우스의 노래도 추천한다.
그때 내 안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길 하나가 내 발치에서갑작스럽고 선명하게 열렸던 그 옜날, 내가 바법을 처음 배우던 시절 같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몸부림치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이 얘기했던 것처럼 내 안에는 달라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창백한 생명체가 시커먼 심연 속에서 내는 속상임이 들린 듯했다. - P466
바다솟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업지 않은가. 나는 평생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을 입술에 대고 마신다.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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