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채우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윤경의 '사랑이 달리다'를 읽고 후편격인 '사랑이 채우다'를 읽은 건 혜나의 몰락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랑이 달리다'에선 혜나와 혜나의 개성 넘치는 가족. 혜나의 연인이 되는 정욱연이라는 캐릭터를 소화하느라 바빴다. 두 사람의 관계 발전에 대한 분량이 적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작가도 한 권으론 이 장엄한 가족사와 혜나와 정욱연의 사랑까지 담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처음부터 연작으로 집필을 시작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 달리다를 읽고 사랑이 채우다를 이어서 읽는다는 건 독자로썬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작 '사랑이 채우다'를 읽으니 피로감이 극에 달한다.
장점이라면 솔직하고 막무가내이며 사랑에 맹목적이라는 특징을 가진 주인공 혜나가 고지식한 나의 공감대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혜나의 매력은 거기까지다. 매력으로 메꿀 수 없는 요소들, 윤리적(?)으로 십 년을 함께 산 남편과 이혼도 하지 않은 체 새로운 남자의 아이를 베고 단지 눈물로 모든 걸 퉁쳐버린다는 건 소설적 상상을 감안한 가치관으로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미 사랑이 달리다에서 소화가 다 되어버린, '그닥 이쁘지도 않고 성격도 별루인 30대 유부녀인 혜나를 샤프하고 능력있고 지적이기까지 한 정욱연'이 왜 사랑하게 됐는지 다시 묻고 싶은 이유다.

'사랑이 채우다'라는 제목처럼 소설 속 캐릭터들은 사랑앞에 수동적으로 끌려 온 꼴이 되었다.
정욱연이 그토록 만나기를 꺼렸던 자신의 형제들과 혜나를 대면시키는 과정에서 형제들의 증언을 통해  세 살때 욱연을 버리고 집을 나간 욱연으로선 얼굴도 모르는 엄마와 혜나가 닮았다는.. 으로 귀결되는 결론에서 설명이 된다. 결과론적인 해석이지만 그들의 관계는 사랑이 다 했고 이들의 사랑은 결국 귀신이 맺어 준 소위 운명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 책으로 연결시켜 준 심윤경의 다른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재밌고 강렬했던 이유는 소설 말미의 영주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으로 나는 그 책을 도중에 놓치 못한 미련을 상쇄받았다.
'사랑이 채우다' 또한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밝힌 의도대로 욱연을 죽여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피로감을 무릎쓰고 이 책을 읽었던 노고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책을 읽고 그저 피로감만 내 몫으로 챙기게 됐다.

소설은 읽다가 맘에 안들면 던져버리면 된다. 그건 독자만의 특권이고 고유한 영역이다. 하지만 접착제를 바른 듯 끈끈하게 손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소설은 어쩔 수 없다. 미워도 끝까지 읽는 수 밖에..
하지만 이 후에 작가의 다른 소설은 읽지 않을 생각이다. 그게 욱연을 죽이지 않고 혜나를 너무 이뻐한 작가에 대한 나의 복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윤경의 [아름다운 정원] 이후 한 권 더 찾아본 작가의 소설 [ 사랑이 달리다 ]를 읽으며 끝이 좀 아쉽다 싶었는 데 검색을 해 보니 연작소설이란다. 후편격인 소설이 한 권 더 있다는 얘기다. 후편의 제목은 '사랑이 채우다'였다. 도서관에 비치 되있을까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마침 대출 중이다. 책이음으로 신청했으니 다음주면 받아 볼 수 있다.  사실 [사랑이 달리다]는 얼른 후편을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난 뒷맛은 조금 씁쓸하다.

소설은 이 나라의 속물적 중산층의 삶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비판적 시선보다는 중산층에서 나고 자란 막돼먹었으나 자의식은 강한 '혜나'라는 주인공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들려준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다가도 그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넘어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소설적 묘미가 있다.
작가의 전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70-80년대 서민의 삶의 굴곡과 인간상을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면 [사랑이 달리다]는 강남의 졸부 부모를 둔, 모든 가치관을 돈으로 환산해야 이해되는 삼남매의 일촉즉발의 삶이 그려진다. 소설의 스토리라인은 뇌관을 따라가듯 위태로우며 자극적이다. 그래서 소설은 재미는  있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다.  그런 위태로운 삶 가운데에서도 거론되는 사랑이야기가 흥미와 짜증을 동시에 유발한다. 어떤 도덕적 잣대를 갖다 대기 민망할 정도로 막 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아니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이 나라의 구조가 근원적 짜증의 원인이지만 그래도 궁금한 그들의 삶과 사랑에 대한 공간이 이 책을 읽게 하는 포인트다.

이 책을 읽은 어느분의 블로그서평을 보니 얄미운 혜나의 몰락을 보고 싶다 라고 적고 있던 데 사실 난 혜나가 얄밉진 않았다.
( 혜나의 제3자적 서술방식 덕분일게다 )
하지만 후편격인 [ 사랑이 채우다 ]에선 혜나가 인과응보적 행보를 겪게 될지 결말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 읽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이 소설을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을까 궁금해진다.
다시 읽는 싯다르타는 소설을 읽으며 나의 의식을 맑게 경건하게 청명하게 깊이있게 해 준 책이었다.
싯다르타의 삶의 깊이와 깨달음을 찾아가는 여정은 곧 내 삶과 맞물려 내게도 한모금의 청청수처럼 전해온다. 그 '옴'의 깊이를 나는 언제쯤 경험해 볼 수 있을까?
싯다르타는 인도의 학자이자 브라만 계급의 아들이다. 편안하고 귀족적인 삶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갈망으로 인해 그 고귀한 과업 깨달음을 찾아 어릴때 부터 절친한 친구 고빈다와 함께 집을 나선다.
사문의 길에 들어선 두 사람은 깨달은 자 고타마 붓다를 만나게 되고 그 곳에서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헤어지게 된다. 고타마 붓다의 제자로 입문하는 고빈다와 진정한 깨달음은 스승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직접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홀로 길을 떠나는 싯다르타. 그 후 그는 도시로 들어가 카말라라는 기생을 만나 쾌락을 경험하게 되고 장사꾼인 카마스와미를 통해 세상을 배우게 된다.
오로지 사색하는것, 단식하는 것, 시를 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그가 세상을 통해 장사하는 법,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법, 여자들과 즐기는 법을 배우며 점점 세상속으로 세상과 하나가 되어가지만 그에게는 늘 구도에 대한 갈망이 있고 자신이 스스로 타락했다는 강한 위기 의식 속에서 그는 자신의 집과 재산을 두고 다시 구도의 길을 떠난다.
그 후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 자신을 건너주었던 뱃사공을 만나고 되고 강에게서 지혜를 배우는 바주데바를 만나 그와 함께 살게 된다. 이후 자신이 남겨준 씨를 통해 아이를 낳아 키운 카말라와 아들을 만나고 카말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들을 키우게 되면서 그는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애착으로 고뇌하게 된다.
어쩌면 불행처럼 찾아온 아들, 구도의 길을 가는 데 있어 혈연이 얼마나 짐스러운 장애물이 되는지.. 하지만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며 싯다르타는 더욱 성장하게 되고 이후의 고백에서 그는 젊은시절 사문의 길을 갈때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며 느꼈던 우월감을 내려놓게 된다. 강에서 배우는 지혜.. 그후 다시만난 친구 고빈다와의 대화에서 진정한 지혜는 관념이나 사상이 아닌 행위이자 삶자체라고 말하며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깨달음을 전수하는 걸로 이 아름다운 소설은 끝이난다.

불교에서 말하듯 윤회의 수레바퀴를 끊지 못하고 매번 태어나서 살고 있는 삶 가운데 우리가 진짜라고 생각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 가족, 돈, 건강, 또 무엇이 있을까? 지식이나 학벌 지위 명예등등 결국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에서는 헌 신발짝처럼 벗어던져야 할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하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아이러니.. 깨달음의 큰 포부를 안고 자만으로 가득차서 집을 떠났던 싯다르타가 결국은 세상을 경험하고 아들을 통한 집착의 굴레를 내려 놓으면서 진정한 지혜를 깨달아 가는 여정을 그린 이 소설은 단순하게 내려놓고 벗어버리고 떠나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꼬부라진 삶이 들어있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 들어있는 깨달음의 가능성 그 완성된 자아를 찾아갈 때 까지 소중히 보듬어야 할 발판이 되는 것이 내 삶이라는, 그것이 싯다르타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가 아닐까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태일 열사

책을 읽기전 나는 전태일이란 인물은 노동운동을 하는 조직안에서 대의를 위해 희생된 희생양일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 '전태일 평전'을 읽고 그가 자신의 길을 철저히 홀로 걸어간 선구자와도 같은 인물임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처럼 홀로 자신의 일을 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한 상징같은 존재였다. 그에게는 어떤 조직력도 함께 뜻을 세운 동지도 따르는 제자도 없었다, 오로지 세상에 약하고 가난하며 소외되고 못 사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깊은 이해때문에 스스로 공부했고 깨닫았고 그리고 견고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몸을 붙태워 산화한 인간이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혹은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세번이나 가출을 한다. 그때마다 구두닦이에서 신문배달등 모진 고생을 하며 돈을 벌고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지만 매번 절망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전태일은 어린 나이에도 병약한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으며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결국 학업의 꿈을 접고 재단사의 길을 가게된다.

그러면서 경험하게 되는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 현실, 힘들게 재단사에 자리에 올라갔어도 고생하는 어린 시다들의 사정을 돌보고 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자신의 사비를 들여 도와주다가 매번 잘리는 전태일은 자신의 힘으로는 아프고 병약한 그들을 도울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그들을 좁은 다락방에 몰아넣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고용주들과 노동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정부기관으로 인해 분노한다.

 

전태일은 자신의 수기에 '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라고 쓰며 그런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바보회를 결성하여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억압된 노동 현실을 알리고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기준법'을 통한 권리를 찾기 위해 힘을 모아 간다.

하지만 소리를 내어도 귀기울여 들어줄리 없는 현실에 부딪히며 전태일은 누구라도 죽음으로 외치지 않으면 이 견고한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 희생양이 자신이 될 거라는 결심을 해 나간다.

누구도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신을 태워 버릴 생각을 하는 전태일은 진정한 사상가였고 선각자였다.

전태일이 죽기 5개월전 두문불출하며 지냈던 삼각산 기도원에서의 생활과 노동환경이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사업체의 설계구도와 직접 쓴 수기나 소설은 그가 정말 국민학교만 중퇴한 학력인지가 의심스럽다.

얼마나 많이 고민하다가 깨닫아 지혜를 얻었는지 옅보이는 그 과정은 마치 종교에서의 깨닫은 자 와도 같은 의식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날 1970년 11월 13일 23세의 나이로 분신을 시도하는 전태일은 마지막 말 '자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태어나서 고생만 하며 살았던 23년의 생을 마친다. 전태일이 11월 13일날 생을 떠난 건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의 소멸은 그 날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쓴 조영래 변호사는 이 책을 쓸 당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전태일의 수기나 일기등의 자료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주위의 눈을 피해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한 건 유명한 일화다.

그런 환경에서 평전을 썼기에 더 분명하게 전태일을 살려내는 글을 써 내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신영복 교수는 책 말미에서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저마다의 욕망을 위해 읽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 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전태일 평전'은 결코 전태일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평범한 인간인 전태일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고난한 삶만을 돌아보는 게 아닌 이 모순되고 억압된 세상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얼마만큼 고뇌하고 갈등하며 깨달아 행동해 나갔는지의 과정을 책 속에서 읽어 내야 한다.

그리고 다행히  '전태일 평전'에는 그런 부분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 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다시 읽었다.

두 번째 읽는 데도 처음 읽는 것처럼 소설이 새롭다.

하지만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울컥 치밀어 오르던 눈물 지점은 동일하다.

첫 번째 단편 ‘입동’과 마지막 단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작가는 각각 아이와 남편의 죽음을 이야기 한다.

처음과 끝을 가족의 죽음으로 열고 닫는 소설집은 하나의 주제로 관통되고 있다.

죽음을 통한 아픔의 유형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도 살아야 하는 부모 혹은 아내, 가해자인 아들을 보듬거나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무게에 대해 작가는 그녀 특유의 문체로 담담하게 쓰고 있다.

바깥은 여름이지만 안은 냉혹한 겨울일 수밖에 없는, 차마 아픔이라고 표현하기도 사치스러운 '고통의 세기'( 강도 ) 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어도 사회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매일 이와 같은 상황을 목도하며 살고 있다.

뉴스에 떴다가 금새 사라지는 활자 속 죽음들..

남겨진 사람들이 겪고 있을 왜곡된 시차를 감히 상상이나 하겠는가?

각자의 감수성의 높낮이로 간혹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것은 망각이 되고 비난이 됐다가 무감각으로 잠식되어 버리는 수순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작가는 소설 속에서 누구도 겪을 수 있는 아픔을 꼼꼼히 복기해 내고 있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내가 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보편적 명제인 ‘죽음’이 특별함으로 치환될 수 있도록 각각의 이야기들을 섬세히 직조해 냈다.

구분 짓는 사회, 공감이 말라버린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에 대해 한 올 한 올 문장으로 펼쳐 놓고 한 번 들여다 보라고 속삭이는 소설들은

그래서일까? 단편 하나하나가 묵직함으로 다가온다.

바깥은 가볍지만 안은 무거운, 온도의 시차만큼 무게감의 차이도 큰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