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입은 옷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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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 <책이 입은 옷> 리뷰


Imageⓒ aladin_책이 입은 옷



다독가는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책을 고를 때와 지금의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이 많이 달라졌음을 가끔씩 느끼곤 한다. 예전에는 학급마다 마련되어 있는 작은 책장 안에 담겨 있는 몇 권의 책 중에서 골라 읽거나, 친구가 좋다며 빌려준 책들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내 방안에 있던 책장은 물론 내가 읽었거나 읽을 예정인 책들로 빼곡하게 채워졌지만, 그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도 있었지만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밟는 아이들이라면 늘상 읽어야 할 것으로 강요되는 책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비교적 한정적이었지만, 나는 부족함을 모르고 천천히 그것들을 꼭꼭 씹어 삼켜 소화시켜왔다. 그런데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나니, 누구도 내게 책을 읽으라 하는 이는 없었고, 권장도서 목록이 적혀 있는 종이 쪼가리도 어디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수많은 책들, 어쩌면 평생 가도 내가 얼굴도 한 번 못 비춰주고 지나치게 될 책들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서점은 여전히 내게 행복을 전해주는 공간이었지만, 지나치게 많은 선택지로 범벅되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중 가장 날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색색깔로 나를 유혹하는 책의 표지들이었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책의 표지에서도 트렌드를 느낄 수가 있는데, 요즘들어 특히 드는 생각은, 세상에는 아름다운 책들이 너무나 많이, 손쉽게 제작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내용을 접하기도 전에 책의 정체성을 내멋대로 판단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책 표지 자체만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그 자체로 무언가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책들. 문제는 책 표지와 알맹이인 책 내용과의 괴리감이 심각할 때이다. 표지에 이끌려 구입하기를 결정했던 책들이 알고 보니 아름다운 표지에 비해 책 내용이 빈약하다거나, 책 제목 및 표지가 나타내는 바와 내용 간의 괴리감이 심각하다든가, 하는 문제들이다. 책을 아름답게 해주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보완해주는 표지라는 것이 정작 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북디자인이라는 분야가 발전할 만큼 출판시장에서 표지의 위상은 두터워졌음에도, 정작 나와 같은 많은 독자들은 책 표지에 속아서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말이다.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표지는 꿈에서 깨는 것이다." (Imageⓒ la_lectrice)




표지로부터 소외된 어느 작가의 날선 외침

그리고 이렇게 '속은 것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독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소설가 줌파 라히리는 본인이 쓴 책이 45개국어로 번역/출간된 명성 있는 작가이다. 그럼에도 늘 자신이 쓴 책의 표지를 디자인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늘 소외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한 권의 책이 45개의 각기 다른 표지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놀라운 일이지만, 동시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책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는 나날의 연속이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본인이 그 책의 주인이지만, 독자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책의 알맹이가 아닌 그 책이 입고 있는 옷이라는 사실은 늘 줌파 라히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작가의 본업이 글쓰기가 아닌, 그 글쓰기의 결과물이 마지막으로 입게 되는 옷 '표지'에 대해 작가는 말하기 시작했다. 줌파 라히리의 책 <책이 입은 옷>이다.


"내 책 표지를 그려줄 그래픽 디자이너와 얘기해본 적이 없다. 그를 모르며 만나본 적도 없다. 

우편으로 혹은 지금처럼 이메일로 완성된 결과물을 받아 본다. 

난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할 수 있으며 조금 수정할 수도 있을 터이다. 

표지 디자이너가 뭔가를 디자인하기 전에 책 전체를 다 읽었을지 아니면 단 한 챕터, 단 몇 줄만이라도 읽었을지 궁금하다. 

그가 내 책을 마음에 들어했을지도 알고 싶다. 

모든 게 불분명하다."


- p. 38.


작가가 '표지'에 대해 이토록 관심 갖는 데에는 본인의 책이라서 때문도 있겠지만, 줌파 라히리가 지니고 있는 출신 배경 때문이기도 하다. 줌파 라히리는 영국의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성장했다. 영어를 쓰고 미국의 생활에 적응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아주지 않고 그저 인도 출신의 이민자라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에 의해 심적 고통을 겪는다. 이는 책 <책이 입은 옷>의 첫 부분인, '교복의 매력'에서도 나온다. 미국엄마들이 가는 옷가게가 아닌 데에서 늘 '이상한' 옷을 사다가 주던 엄마, 그리고 이로 인해 늘 튀는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사촌들이 교복을 입는다는 사실을 부러워 하며 미국에서의 자신의 옷차림이 "아주 먼 곳에서 왔다는 걸 보여줬다"고 말한다. "옷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난 그 옷이 몹시 버거웠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마음대로 옷을 입는다. 

하지만 과거의 그 불안, 옷을 잘못 입어 뭐라 핀잔을 듣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그림자로 남아 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적당한 옷을 골라 입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간혹 시달릴 때면 

차라리 교복 같은 유니폼을 입는 게 더 간단하지 않을까 아직도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 p. 19.


<책이 입은 옷> 목차 (Imageⓒ la_lectrice)



'벌거벗은 책'을 기대하는 건 이제 무리일지도

즉 작가의 이 같은 성장배경은, 작가 본인이 성장하는 동안 이민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들고 만다. 나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 아닌, 옷이나 겉모습과 같은 피상적인 것들을 보며 자신을 판단하는 타인들의 시선에 질려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작가가 책의 표지를 바라보는 시각과도 연결 된다. 작가인 내가 써내려간 책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표지들의 연속, 그리고 어린 시절 작가가 도서관에서 보았던 표지 없는 '벌거벗은 책'들에 대한 기억, 결국 표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생각을 이어나가는지를 <책이 입은 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족스러운 표지와 그렇지 않은 표지, 때로는 책의 내용을 보기 보다는 작가 본인이 이민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전혀 상관 없는 이미지를 구현해놓은 책의 표지들을 놓고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표지와 책 내용의 관계에 대해 천천히 풀어나간다. 어쩌면 줌파 라히리가 원하는 것처럼, 온전히 '벌거벗은 책' 즉, 책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책을 펼쳐보는 수밖에 없는 책들을 이 시대에 기대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줌파 라히리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책의 본질은 내용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상업적인 이익을 올리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해놓은 책 표지에만 집중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순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이 완성되어 서점의 가판대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책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버렸던 작가 자신의 경험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들의 마음 한 켠을 따끔하게 만든다.


"텍스트 언어가 하나의 장벽일 수 있듯 표지도 장벽을 만들 수 있다.

이 얘기를 쓰고 있는 동안 나는 네덜란드의 한 서점에 있었다. 

변에 있는 책이라곤 모두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는 네덜란드어 책들이었다.

표지를 넘겨 첫 페이지를 읽어봐도 뜻을 알 수 없었다. 

난 책을 보고 그 시각적인 효과만 흡수했다. 책은 그냥 물건일 뿐이었다. 

서점이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박물관인 것 같았다."


- p. 68.



그런데, 줌파 라히리는 이 책의 표지는 마음에 들어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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