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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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 리뷰


 Imageⓒ네이버책


"반장,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

내게 고맙다고 말한 뒤 택시를 타고 떠난 그녀는 연말의 서울 거리를 가로지르는 택시 안에서

언젠가 살아 있는 사람이 읽을 수도 있는, 이번에는 꽤 쓸모 있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 p. 28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 하나의 빛줄기가 되어 다가오는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라고, 어릴 적에 읽었던 어느 책의 구절이 말했다. 아마도 그건 삶의 고난과 역경에 부딪힌 사람들이나 삶의 중간에서 끝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쓰였던 책이었던 것 같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은 아마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만나게 될, 빛줄기가 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삶을 조금 더 살아내는 쪽이 언제나 이득이라고. 때문에 나는 매순간 이미 와버렸는지, 혹은 아직 만나지 못한 건지 모를 그 사람을 기다리고 고대하고 있다.

타인의 빛에 휩싸이는 순간 : <빛의 호위>

학창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같은 반 친구에게 팔아서 급전이라도 만들라는 의미로 아버지의 카메라를 훔쳐다가 준 반장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조해진의 소설 <빛의 호위>는, 이처럼 나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빛에 휩싸이고, 또 타인에게 빛을 나눠주는 존재가 되는 순간을 그려낸 작품이다. 돈도 없고 학교에 갈 여력도 없던 '권은'은 반장인 '나'가 준 카메라를 팔지 않는다. 대신 집안의 사물들을 조금씩 찍다가 점점 집 밖의 사물들을 포착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팔아 돈을 마련하지는 않았지만, 반장의 카메라는 가난하고 소극적이었던 권은이 세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둘은 사진작가와 기자로 조우한다.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권은은 분쟁지역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떠났다가 파편을 맞고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은 채 돌아온다.

"그래서 어떤 사진을 찍을 계획인데요?

나는 괜히 맥주나 거푸 비우며 건성으로 그런 질문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람을 찍어야죠.

그녀가 대답했다.

전쟁의 비극은 철로 된 무기나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죽은 여인을 떠올리며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젊은 여성의 젖은 눈동자 같은 데서 발견되어야 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당신이나 나만큼만 울었을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 그 자체니까.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유려한 문어체로 덧붙여 설명하는 그녀를 나는 어리둥절하게 건너다봤다."


- p. 13

결국 카메라를 준 '나'와 그 카메라를 들고 세상으로 나와 거리를 누비게 된 권은의 관계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사주는 그 짦은 순간"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제목인 <빛의 호위>는 사물에 숨겨져 있던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 그리고 누군가의 빛이 나를 향해 다가와 감싸 안는 느낌 모두를 아우르는 표현인 것 같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직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p. 32

조해진 작가 Imageⓒ중앙일보

​***


단편 <빛의 호위> 이외에도 해당 책에는 조해진 작가의 소설이 다수 담겨 있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 각지에서 투명인간처럼 취급 받고 있는, 혹은 그래왔던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외국인노동자(<번역의 시작>)부터 국가 폭력의 희생자(<사물과의 작별>, <동쪽 백의 숲>), 입양아(<문주>), 그리고 고아(<작은 사람들의 노래>) 등 조해진 작가의 작품 속에는 목소리를 내본 적조차 별로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사회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나 자신조차 편협한 시각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 창비 <빛의 호위> 서평단 게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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