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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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드 비강, <실화를 바탕으로> 리뷰

 Image ⓒ 김영사


글쓰기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작가의 현실을 면밀하고 세세하게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못내 불편해하면서도 열광해마지 않는 독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데 있다. 책이라는 종잇장을 통해 넘겨 보던 허구같은 이야기가 사실은 작가라는 현실의 존재를 통해 노랫말처럼 흘러나온다는 점은, 언제나 독자들을 궁금증에 빠지게 만들어버린다. "그 작가, 정말 그런 삶을 살아낸 거야?"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무리 봐도 책 속의 이야기가 작가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는 걸 느낄 때 독자들은 내심 불안하면서도 호기심을 느낀다. 문학이라는 우울과 근심, 자기고민의 장르 속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내는 저 주인공이 사실은 작가 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점은 타인의 삶에 대한 동경과 연민을 가진 보통의 인간적인 마음과, 내가 쉽게 알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아무도 모르게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관음증적인, 조금은 인정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마음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판타지는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들으면 즐겁고, 때로는 위안이 되며 교훈까지 얻을 수도 있는 그저 남의 이야기같은 허구의 세계가, 사실은 내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실제 삶이었다는 서프라이즈. 그건 종이 안에서만 움직이던 인형들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마법같은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별도의 기교나 장치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라는 거짓말같은(가끔은 정말 거짓말이다!) 몇 마디를 적어주면서 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대한 판타지

델핀 드 비강의 책 <실화를 바탕으로>는 픽션이 어디까지 진짜를 담아낼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작품이다. '델핀'이라는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전작의 성공 이후 글쓰기에 무력감을 느낀 주인공이 L이라는 미스테리한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냈다. 소설가인 주인공의 생활 전반이나 인생 경로는 실제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의 그것과 빼곡히 닮아있다. 어머니의 자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간해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남편과는 이혼해 쌍둥이 아들 둘을 데리고 산다는 점, 동시에 문학 관련 방송을 진행하는 저널리스트 남자와 연인관계에 있다는 점 등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이 '픽션'인지, '자서전'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들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놀라울 정도로 빼닮은 소설 속 주인공의 삶에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게까지 느껴지는 L이라는 여성이 스스럼없이 녹아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L은 아주 빠른 속도로 주인공 델핀의 삶을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신작이 출간되고 몇 달 후, 나는 글 쓰는 일을 중단했다.

그로부터 삼 년 남짓, 나는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과

장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한 줄도. 공문서에 대한 회답, 감사카드, 휴가지에서 보내는 엽서,

하다못해 쇼핑 목록 몇 줄조차 쓰지 않았다.

어떤 모양새든 형식을 갖춰 써야 하는 글이라면 한 줄, 한 마디도.

노트와 수첩과 메모지만 봐도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

나는 더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쓰기, 그건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다.


- p. 7

​글쓰기에 진척을 낼 수 없는 작가 델핀에게 L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델핀을 완전히 꿰뚫어보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를 잘 하는 L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서전을 써주는 대필작가다. 단지 사교계의 친구처럼 델핀의 인생에 등장한 L이라는 이 매력적인 여성은, 점차 델핀의 소설 집필을 비롯한 생활 전반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며 두려움에 자꾸만 숨어버리는 델핀에게, L은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진실된' 이야기의 집필에 대해 그녀의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그리고 점차 L은 델핀의 삶 전반을 대체하려 한다.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는 L의 공작에 델핀의 생명조차 위험해질 무렵, 가까스로 델핀은 L로부터 도망친다. 하지만 그 땐 이미 델핀의 삶 일부가 공포와 자기혐오의 감정으로 얼룩진 이후다.


애거서 크리스티를 떠올리게 하는 철저하게 짜여진 '심리스릴러'

책 <실화를 바탕으로>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흥미로운 스토리에 있지만은 않다. 제목 '실화를 바탕으로'가 의미하는 것처럼, 작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가져다 넣은 것 같은 소설 속 수많은 배경과 장치들. 그리고 주인공 델핀과 L이라는 여성이 주고 받는 대화에, 실제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이 평소 가지고 있었던(것처럼 보이는) 소설가로서의 고민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진실된 글쓰기에 대하여' '소설가는 픽션을 통해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가' 등 책을 읽는 독자마저도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고민을 빠지게 만든다. 실제 줄거리 상 델핀은 픽션을 다루는 소설가, L은 진실(자서전)을 다루는 대필작가라는 점을 들면 이들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정교하고 가치 있다.


 Delphine de Vigan 델핀 드 비강​

Image ⓒ parlerdamour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이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이유는, '심리스릴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L의 집착일 수도, 혹은 델핀의 편집증적인 환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두 여성의 기묘한 만남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결말을 읽어버린 지금도, 과연 L은 델핀의 삶에 정말로 존재했던 인물인가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 때문. 책을 덮고 난 이후 등 뒤가 서늘해지는 건 이 책이 실제로 델핀과 L이 그토록 주장하고 싸웠던 픽션과 진실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곳에 머문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이 소설의 막을 내리는 인물이 결국은 델핀인지, 아니면 델핀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린 L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책의 마지막 줄을 읽을 때면 더 이상 이 책이 얼마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심리스릴러를 꼽는다면 이 작품이 단연 최고일 거라 생각한다.


몇 시간 동안 나는 이 가설에서 저 가설로 옮겨다녔다.

결론을 말하면 어떤 가설도 진정으로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어쩌면 L은 정말로 그 모든 장면을 체험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L의 삶과 책꽂이의 책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 건 기이한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현실은 픽션을 능가할 뿐 아니라, 픽션을 병합하고 편집한다......

만일 그렇다면, 현실은 누구 말마따나 픽션보다도 훨씬 멀리 갈 배짱이,

제대로 즐길 배짱이 있는 것이다.

 

- p. 393



* 덧붙임

쓰다보니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많이도 읊었다. 실제로 저자와의 만남 자리에 다녀온 독자로서 느끼는 건, 이 책에는 작가의 거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물론 L이라는 여성은 예외다. 아닌가?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작가는 끊임없이 이 책이 실제를 바탕으로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일관하는데, 독자로서는 작가가 교묘하게 설치해 둔 덫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다.

서평 같은 거 읽지 말고, 그냥 한 번 책을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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