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트 슈피겔만, <쥐>

© 아트슈피겔만 <쥐>


“여기는 좀 돌아서 가야겠어요. 얼마 전에 아동학대로 뉴스에 난데거든. 경찰이고 기자고 너무 많아서 지금 지나갈 수가 없어.” 며칠 전 동네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뉴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는 것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음을 말해주었다. 지인이 사는 곳은, 어린 자식을 계속해서 학대해오다가 끝내 숨지게 만든 부모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바로 그 동네였다. “택시 아저씨 얘기 듣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지. 알고 보니 바로 옆이더라고.” 문제를 비로소 직시할 수 있는 건, 재난도 일상이 되는 순간이다. 뉴스를 보면 남 일이지만, 뉴스가 내 일이 되면 문제가 바로 보이기 시작한다.


 

재난의 일상적인 기록, <쥐>

재난은 항상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어 왔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닌 사건을 둘러싸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입장 차이다. 사람들을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고통스럽게 만들고 마는 재난의 특성상, 모든 관전 포인트는 재난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람들의 입장 차이라는 것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보통은 ‘덮으려는 자’와 ‘고통스럽더라도 안고 가려는 자’이다. 그리고 대개 ‘덮으려는 자’들은 ‘고통스럽더라도 안고 가려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다 지나서 왜 아직도 그 얘기를 하고 앉아 있어?”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는 고통스러운 재난과 역사의 흔적을 ‘다 떠안고 가려는’ 자의 육성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겪고 살아남은 생존자인 아버지와 이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단순히 역사책에 쓰인 몇 줄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이 상세하고 일상적이다. 아버지의 단란했던 신혼생활부터 시작해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진행되는 이야기는 아들과 아버지의 담담한 대화로 전개되지만, 실제 내용들은 끔찍하고 상상하기 무서운 일들이다. 재난이 곧 일상이었던 현실을 살아온 아버지의 경험을 가만히 듣다 보면, 도무지 이성적이라고 볼 수 없는 당시 아버지와 주변 가족들의 행동들이 차츰 이해되기 시작한다. 극도의 공포와 배고픔 속에서 가능한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보다는 오직 ‘나’ 자신을 생각하는 일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도 피해갈 수 없는 편견의 작은 씨앗

독특한 점은 만화의 형식을 빌려 유태인을 쥐로, 나치즘을 고양이로 표현해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개구리나 돼지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단순히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쥐나 고양이지만, 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비이성적일만큼 폭력적인 당시의 인종차별주의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물론 현재까지도 우리가 사는 사회 곳곳에 인종차별이 녹아들어 있다는 점을 든다면, 현실은 그저 다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뿐이지 서로를 아예 다른 세계의 동물들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쥐>는 총 1권과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까지는 나치즘 아래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견뎌낸 아버지의 일상적 기록이다. 반면 2권은 이를 기록하고 있는 아들 세대의 관점과 더욱 가깝다.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생존해 나온 뒤,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한 아버지는 비정상적일 정도의 히스테리와 강박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간다. 이를 바라보는 아들은 아버지를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특히 나치즘으로 인해 극도의 인종차별을 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아버지가 흑인에 대해서 또다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장면은 시사점이 깊다. “깜둥이와 유태인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작가인 아들은 여과 없이 책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일상을 붕괴하는 재난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작은 편견과 생각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아트슈피겔만 <쥐>


 

기록의 가치

작가인 아트 슈피겔만은 아버지의 경험을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만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생생한 일상의 기억을 되살려 그림과 글로 옮기는 것은 물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아버지조차 사실은 인종차별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대로 내보였다. 나치즘의 피해자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점은 기존의 상식으로는 거북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다. 당장 내 앞에 주어진 부조리한 상황에는 분노하면서도, 내가 유리해지는 상황에서는 입을 꾹 다물게 되는 것. 아트 슈피겔만은 아들의 시선에서 아버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면모까지 가감 없이 그려냈다. 그의 책을 읽으면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항상 다 늦어서야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역사적 현장이라면 기록하는 일이 가진 가치 자체가 부정되는 일도 있다. “다 지나간 일을 왜 이제 와서 굳이…”라고 말하며 만류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 기록이란 빨리 흘려보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의 가치는 단순히 무언가를 적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 놓았다가 두고두고 펼쳐보는 데 있다. 아동학대 사례가 2014년부터 1만 건을 넘어섰고, 지난 4년간 약 70%나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뉴스거리가 되니까 몇몇 아동학대 범죄들이 사회의 큰 문제인 것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이마저도 몇 개월 뒤 금방 잊혀버리고 말 것이 분명하다. 고통스러운 사건을 뉴스가 아닌 현실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은 언제까지나 기록하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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